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미경 Aug 19. 2020

그날의 완벽한 맥도날드

62년생 박미경 이야기

2000년대 초반, 나는 인사동에 있는 한 대안공간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었다. 대안공간(alternative space)이란 기존의 상업화랑이나 공공기관이 할 수 없는 대안적인 미술활동을 하는 공간이었다. 수익을 생각지 않는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입지가 없는 젊은 작가들을 지원하고 진보적인 미술 담론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미술인들이 사비를 털어 만든 곳이었다. 80년대 '그림마당 민'이라는 전시장처럼 그러한 실험적인 공간들이 90년대와 2000년대에 이곳저곳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느 봄날, 내가 일하는 그곳에서는 진보적인 성향의 작업을 하는 한 젊은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자동차의 매끈한 겉면을 떼어낸 듯한 메탈 느낌의 추상적인 조각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한가한 오후, 전시장 문이 열리고 깔끔하게 양복을 입은 하이칼라 백인이 들어와서 전시를 빠르게 휙휙 둘러봤다. 주변의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같았다. 그는 오늘 고향에 가는데 한국 작가의 작품을 사고 싶다고 했고, ALTERNATIVE라고 쓰여 있으니 젊은 한국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이 있을 것 같아서 들어왔다고 했다. 



그는 작품의 의미를 설명해 달라고 했다. 영어가 짧은 나는 대충 아는 영어단어를 나열하며 그럴듯하게 피상적인 설명을 했다. "겉만 반지르르하면 되는 사회, 외면을 중시하는 한국사회를 풍자한 작품"이라고 말이다. 오그라들었지만 내 영어실력으로는 더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했다. 그 외국인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는데,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사실 그에게 의미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그중 하나의 조각을 가리키며 얼마냐고 물었다. 그런데 작가나 전시장 측이나 작품이 팔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않아서 작품 가격을 물어보지도, 써놓지도 않았었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무명작가의 작품을 전시를 통해 (작가와 관계가 없는) 관람객이 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보통은 '기금 마련 전시회' 같은 것을 통해서 지인들이나 콜렉터들이 사주는 것이 작품 판매의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제야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가격을 물어봤다. 작가도 팔릴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지 않았는지 놀라서 나에게 얼마 받으면 되냐고 물어봤고, 우리는 서로 당황한 채 소심한 금액으로 합의를 보고 그 외국인에게 가격을 얘기해줬다. 그는 비행기 시간이 급한지 그 자리에서 현금으로 지급을 하려 했는데, 그가 나에게 내민 돈은 달러였다. 


나는 당황하여 달러말고 원화를 달라고 했다. 나중에 사람들로부터 달러로 받지 그랬냐고 핀잔을 먹었지만, 나는 환율이니 그런 개념이 전혀 없었을뿐더러, 달러가 나에겐 낯선 돈이니 혹시라도 위조지폐일 수도 있다는 과도한 조심성을 발휘했던 것이다. 달러를 더 반기리라 생각을 했는지 그 외국인도 조금 당황하는 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없는 와중에도 그는 작품을 꼭 사가야 했는지 순순히 환전을 해왔다. 


그런데 포장을 하려니 매우 곤혹스러웠다. 이런 상황이 거의 없었던지라 당시 전시장에는 제대로 된 포장재료를 구비해 놓고 있지 않았었다. 나는 진땀을 흘리며 전시장 창고의 다른 작품을 싸고 있던 뽁뽁이를 거칠게 벗겨 판매된 작품을 대충 쌌다. 그런데 이제는 또 작품을 넣어줄 마땅한 가방이나 봉투가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던 중 마침 점심으로 먹으려고 포장을 해온 맥도날드 봉투가 내 눈에 들어왔다. 쪽팔린 일이라는 인식을 하기보다는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나는 망설임 없이 맥도날드 봉투에 대충 싼 작품을 넣어주었다. 그 순간 그 외국인은 크게 웃으면서 "PERFECT!!"라고 엄지를 추켜올리더니 맥도널드 봉투를 들고 들어올 때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오오 신이시여, 그 외국인이 "음, 한국의 얼터너티브는 매우 쿨 쉬크하군"이라고 생각하기를, 그가 사라진 후 나는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영어도 못해, 작품 가격도 몰라, 돈도 환전해오라고 해, 작품도 찢어진 뽁뽁이로 대충 싸줘, 심지어 맥도날드 봉투에 넣어주다니.... 오오, 신이시여, 용서하소서, 한국의 얼터너티브가 뭐 그리 잘나서 당당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절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나저나 작품이 팔린 그 작가는 내가 어떻게 구라를 까서 작품을 판 줄 알고 무척 고마워했다. 그냥 어떤 외국인이 우연히 와서 급하게 사간 것이라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내가 뭔가는 했으리라 생각하고, 그 이후에도 나만 보면 감사인사를 반복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