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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경 Aug 09. 2020

너의 바지핏이 너를 말한다

62년생 박미경 이야기

"너의 바지핏이 너를 말한다"

내가 만든 문구이지만 영원히 믿어 의심치 않는 문구이다. "네가 입은 옷이 너를 말한다"보다 섬세해서 맘에 든다.


실제 나이는 60을 바라보지만 내 외모는 그보다 젊어 보인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패션 스타일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그리고 내 패션 스타일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바지핏"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나를 나답게 하는 "바지핏"은 내 정체성이며 나에겐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종이에 그림을 그릴 때면 내가 입고 싶은 옷들을 그렸다. 국민학교 때 어머니가 잠깐 양장점을 운영했을 적에는 내가 디자인한 옷을 만들어 달라고 졸라서 입고 다니기도 했고, 중고등학교 때에는 빠듯한 용돈을 모아 이대 앞에서 청바지를 맞추곤 했다.



20대가 된 80년대의 살벌한 대학교 교정에서는 내가 입고 싶은 나이키 야구 점퍼, 죠다쉬 청바지,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거부당했지만, 브랜드 로고의 실밥을 다 뜯어서 티 나지 않게라도 입고 다녔다. 내게 중요한 것은 로고가 아니라 트렌드에 맞는 핏과 디자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80년대는 옷뿐만 아니라 여타 개인적인 취향을 드러내기가 힘든 시대였고, 90년대 내가 30대였을 때에는 아이를 키우느라 옷에 신경을 쓸 마음의 여유도, 경제적,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2년간의 모유수유는 어디서나 아이에게 수유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옷만을 허용했으며, 누웠다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주부에게는 신축성 있는 고무줄 바지가 최선의 선택이었다.


결국 내가 40대가 되었을 때에야 나는 패션에의 열정을 되살릴 수 있었다. 경제적인 여유는 없었지만 더 이상 옷에 대한 사랑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나는 옷을 마구 사들였다. 내가 원하는 옷이 없을 때에는 빈티지 샵을 뒤지고 다녔다. 내가 명품에 눈을 뜨지 않은 것이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일찍이 패가망신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50대가 되었을 때, 전 세계적으로 '놈코어 룩'이라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바지 같은 슬랙스나 치노 팬츠, 예전에 유행했던 맨투맨이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 룩의 특징이 '남과 다르지 않은 평범함, 익명성 속에서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인데, 세상에 잔뜩 주눅 들어 있던 나는 이 부분에서 마음의 평화와 안정감을 얻었다. 또한 나이 들고 쇼트커트 머리를 하고 안경을 쓴 나에게 잘 어울리는 룩이었으며, 험한 일을 하는 나에게는 워크웨어의 기능도 겸할 수 있는 아주 효율적인 옷이었다. 이 룩은 나에게 '패션의 정착'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안겨주었다.   


아이템이 정착되고 보니 이제 관건은 '핏'이었다. 특히 놈코어 룩의 '바지핏'은 내가 세상을 보는 매우 중요한 필터가  되었다. 거리를 걷거나 전철을 타면 사람들의 바지핏을 유심히 관찰했고, 바지핏으로 사람들의 직업이나 성향이나 미감을 추측해 보곤 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마음에 드는 핏의 바지를 구할 때까지 나의 쇼핑은 계속되었다. 시즌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잠시도 관심과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되었다. 이대 앞의 단골 수선집에도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열정과 노력이 결실을 볼 때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고 진정한 삶의 의욕이 불타올랐다.


"바지핏이 남다르시네요"

"그 바지 어디서 사셨어요? 핏이 죽이네요"

"누가 이런 핏을 보고 50대라 하겠어요"
누군가 내 핏을 알아봐 주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뿌듯했다. 다른 어떤 칭찬보다도 기분이 좋았다.


원치 않는 핏과 구린 디자인의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 직장에서는 퇴근을 위한 환복의 순간에야 나는 숨을 몰아쉰다. 내가 선택한 옷을 입는 바로 그 순간에야 진정한 나로 부활하고 오로지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는 죽을 때까지 우리 엄마가 입는 아줌마 핏이나 등산복 핏의 바지는 입지 않을 것이다. 천재지변이 생기면 가족과 지갑  다음에 가장 먼저 챙겨야 할 바지 몇 개 조차 이미 정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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