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요전쟁 마지막 글
송요의 전쟁은 팽팽해 보였지만 양측 힘의 균형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1004년 마침내 소태후는 결단을 내린다.
소태후와 요성종은 직접 20만 대군을 이끌고 대대적인 남벌을 시작한다.
요나라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송의 주요 거점을 돌파하며 침입해왔다.
특히 송군이 강하게 사수하고 있는 지역은 모조리 피해가며 내려왔다.
전략에 밝은 소태후는 기병으로 구성된 요군이 전격전을 펼칠 수 있도록 평야를 중심으로 빠르게 남하해왔다.
요군의 빠른 진격에 송나라의 여러 대신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요군은 개봉에서 겨우 100리 떨어진 곳까지 도달했다
요군이 개봉 바로 앞까지 다다르자, 많은 대신들이 도성(개봉)을 버리고 천도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참지정사 왕흠약은 승주(지금의 난징)으로 천도해야한다고 했다. 추밀부사 진요수는 익주(지금의 청뚜)로 도성을 옮겨야한다고 했다.
이렇게 왕의 몽진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때 주전파인 재상 구준이 말했다.
"도성을 버리고 천도를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를 즉시 참해야합니다.
반대로 폐하가 친히 토벌하러 나가신다면 전국의 송군은 단결하여 적들을 물리칠 것입니다.
친정이 어려우면 계략으로 적의 의도를 차단하고 성을 굳건히 지켜 적이 지치길 기다려 역습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성을 버리고 초(난징)나 촉(청뚜)으로 달아나시면 민심이 이반할 것이고 그 틈에 적들이 더욱 진입한다면 송의 천하를 어찌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송진종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게 된다.
송진종은 전주(전연)에서 요군을 맞이하게 된다.
전주는 송나라 장수 이계륭은 전주를 사수하고 있었다. 송진종이 전주에 도착하고 나자, 삼면이 요군에게 포위당했다.
당시 요군의 지휘관은 소달름이었다. 그는 여태 참가한 전쟁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은 요나라의 명장이었다.
소달름은 의외로 전주성이 함락되지 않자, 이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기병 수십기만 이끌고 전주성 주위를 순찰하고 있었다.
이 때, 어디선가 상자노(상에 놓고 쏘는 쇠뇌)가 날아와 소달름의 이마 정중앙을 맞췄다.
소달름이 쇠뇌에 맞는 순간, 송나라 병사들은 환호를 질렀다.
주위의 요나라 병사들이 그를 급히 데리고 진중으로 옮겼지만 숨지고 말았다.
송군이 이 때를 틈타 공격에 나섰다면 요군은 무너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많은 장수들이 성문을 열고 나아가길 간청했으나, 송진종은 감히 나서지 못했다.
한편, 무패장군 소달름을 잃은 소태후는 5일 동안 통곡하느라 정무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송나라는 요나라와 전란을 겪으면서 힘에 의한 평화를 이야기하는 주전파와 화해를 통해서 외침을 안정시키고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는 것이 낫다는 화친파 간의 정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실제로 송진종 기간에 함평의 번영이라는 시기를 맞이했다. 국가는 경제적으로 크게 흥했으며 학문은 높이 섰었다.)
양측은 내부정쟁을 벌이면서 주전파들은 군사적 대응에 힘쓴 반면, 화친파들은 타협과 평화를 주장했다.
전투를 벌이면서도 송과 요 양측에는 화친을 주장하는 비둘기파들이 있어서, 그 동안에도 사신을 주고 받으며 평화조약에 대해서 논의를 주고받아 왔었다.
당시 화친파는 도성을 버리고 달아나야 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으로 보았다.
그들은 요나라 사령관이 사망한 이 때, 유리한 상황임을 활용하여 화친을 맺을 때라고 주장했다.
반면 구준 같은 주전파는 강하게 반발했다.
원정길에 지친 요군의 보급을 차단하고 역공을 나서면 섬멸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이 또 쳐들어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화친파들은 재상 구준이 전쟁을 빌미로,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고 병권을 쥐려하고 있다고 모함했다. 이는 송나라 개국 이래 병권을 쥐는 것은 가장 금기시되는 말이었다.
이에 재상 구준은 더이상 전쟁을 주장하지 못했다.
특히 송진종은 누구보다도 평화주의자였다.
"나중에는 유능한 사람이 나와서 막아줄 것이고 나는 지금 이 일이 급하고 전쟁을 끝내고 싶다."
이렇게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송나라는 화의를 진행하기로 한다.
결국 송나라는 똑똑하다는 조이용을 사신으로 보내 화의를 제안했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는, 요나라 측에서 먼저 항복한 장수 왕계충을 보내 화의제안이 왔었고, 이에 어떻게 응할 것인가에 대해서 주전파와화친파가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승리할 기회를 포기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협상 테이블에 두 나라가 마주 앉았다.
송과 요는 처음에는 서로의 주장을 펼쳤다.
송은 요나라에게 칭신(신하로 자처할 것)할 것과 유계(베이징 일대)를 할양하라고 요구했다.
요는 후진이 원래 요나라에게 바쳤다가 후주가 다시 탈환했던 삼관(와교, 익진, 어구) 이남의 땅을 요구했다.
양측이 팽팽한 가운데,
송진종은 돈을 얼마든지 줘도 좋으니 땅은 절대 할양해주지 말 것을 지시한다.
조이용 역시 땅을 빼앗으려 한다면 자신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왕에게 답했다.
송진종은 조이용에게 요나라에게 전쟁배상금으로 100만냥까지는 지불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이 말을 들은 구준은 조이용을 조용히 찾아가
"30만냥을 넘기면 목을 치겠다."라고 말하고 협상으로 다시 보냈다.
조이용은 요나라를 설득했다.
굳이 삼관 이남의 땅을 차지 하지 않아도, 그 곳에서 내는 세금보다 많은 금액을 송나라가 세폐로 줄 것이니, 요나라에서는 특별히 관리할 필요도 없이 그 지역의 세금을 모두 걷을 수 있으니 땅보다 세폐가 더 좋지 않겠냐며 설득했다.
마침내 조이용이 돌아왔다.
옆에 신하가 조이용에게 얼마를 주기로 정했는지 물었고 조이용은 손가락 세개를 보여주었다.
이를 보던 송진종은 300만냥으로 알았다가, 조이용이 30만냥으로 했다고 하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30만냥이나 굴복하고 매년 바쳐야하는 모습에 기뻐하는 송진종을 보며 30만냥으로 적을 돌려보냈음을 크게 칭찬했다,
구준 등의 주전파들은 왕의 이런 모습에 크게 낙담했다.
결국, 양국은 전연의 맹이라는 조약을 체결한다.
전주를 전연이라고 부르므로 전연의 맹이라고 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송과 요는 형제국이며 요성종이 송진종보다 어리므로 요는 송을 형이라 부른다. 이후는 나이를 기준으로 호칭을 정한다. 송과 요는 백구하 (허베이성 중부)를 쌍방 경계로 삼고 서로의 영토를 존중한다. 송은 매해 비단 20만필과 은 10만냥을 바친다. 도망친 범죄자를 비호하지 않는다. 국격을 따라 새로운 요새나 수로를 만들지 않는다. 양국은 국경에 시장을 설치하고 무역을 시작한다.'
라고 합의를 보았다.
이후 국서에는 송은 스스로를 남조, 요를 북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송은 연운16주를 찾기 위해 송요전쟁을 일으켰지만 결과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된다.
이후 송은 영토를 간신히 지켰지만 매해 요나라에 엄청난 세폐를 바쳐야 했다.
이래서 흔히 송나라를 '돈으로 산 평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누구는 이념에 구애받지 않고 정치경제적 실리를 챙겼다고 말하기도 한다.
많은 사서에서 송이 거란에 준 세폐가 송의 국력을 소진했다고 하지만, 누구는 평화를 통해 송과 요 간의 교역을 시작함으로써 그보다 많은 이득을 얻었다고 한다.
돈을 지불했던 어쨌든 이로서 송은 확실히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했고 그 덕분에 경제적 번영을 이루게 된다.
평화시대의 송나라는 화려한 경제적 번영을 구가한다.
그러나 이후 송나라의 군사력은 줄어들었다.
송에게 칭신하던 서하가 힘을 키워 송나라를 괴롭히더니, 결국 송나라는 서하에게도 세폐를 내면서 평화를 유지하게 된다.
요나라 역시 송나라를 완전히 굴복시킬만큼의 힘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요나라는 실질적 이득을 취했다.
중원과의 교역은 만몽(만주 몽고)지역 국가의 경제에는 필수적이었으며, 무역은 물론 송이 바치는 세폐를 통해 많은 이득을 얻었다.
그리고, 요나라 역시 평화를 원했다. 송이 먼저 공격해오지 않았다면 요는 이렇게 남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전연의 맹 이후 요나라 성종은 평화로운 국제정세에 크게 만족하고 송나라 문물을 받아들이며 좋아했다고 한다.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재미가 있었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