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수박을 보았다!

by 동그라미

올해 여름도 다 지나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름에도 수박을 사 본 적이 없구나. 마트에 들를 때마다 비싼 가격을 보고 그냥 지나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5,000원이라고 해야 겨우 소(小) 자를 살 수 있고 먹음직스러운 건 20,000원 ~30,000을 지불해야 집으로 가져갈 수 있다. 8,000원 ~ 9,000원이면 대(大) 자 수박을 살 수 있었던 기억이 자꾸만 카트로 수박을 옮기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수박을 사지 못하도록 막는 요인은 하나 더 있다.

그건, 남편.


남편이 수박을 싫어하느냐, 물론 과일을 즐겨먹는 편은 아니지만 수박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달달하고 시원한 수박이 갈증을 해소하고 한여름 건강을 지켜주는 데 말이다. 여하튼 집에서만큼은 수박 먹는 것을 꽤나 주저하고 싫어한다. 마치 수박에 원수를 진 사람처럼. 그러니 마트에서 가격보고 놀란 가슴, 남편 보고 더 놀란다. 수박 곁에 얼씬도 못하게 카트를 끌고 저만치 앞으로 휙! 가버린다.


그러고 한 마디 던진다.

"안돼! 수박은 절대로! 그렇게 먹고 싶으면 장모님한테 가서 먹고 와!"


에라이~!

내가 이놈의 수박을 안 먹고 말지!

흠, 칫, 뿡이다!




둘만 살아가는 단출한 가족인지라 가정 경제의 모든 것은 서로 합의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주방 살림 역시 마찬가지. 때로는 꼼꼼한 남편이 더 자세히 살림을 도맡아 주어 느긋하고 편안한, 게으른 아내가 되어가고 있긴 하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아?


언젠가 수박을 맛있게 먹고 난 후 음식물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온다며 짜증을 냈다. 수박 껍질을 아무리 잘게 썰어도 한 번 수박을 먹고 나면 음식물 쓰레기 때문에 처치곤란이라며 수박을 그만 먹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워낙 꼼꼼한 사람인지라 우리 집 냉동실에는 신선한(?) 음식물 쓰레기를 담은 쓰레기봉투가 일렬로 나열되어 있었다. 매번 배출되는 음식물 쓰레기는 아무리 잘 보관한다고 해도 그때그때 처리하지 않으면 부패하는 냄새와 날파리들 때문에 골치를 썩기 마련이다. 그래서 남편은 아이디어를 하나 냈는데 쓰레기봉투에 담아 바로바로 냉동실에 얼리는 것.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가 다 차고 나면 음식물 쓰레기 수거함에 버리는 것이었다.


집으로 놀러 온 친구들이 냉동실을 보고 놀란다. 있어야 할 냉동식품은 없고 그 자리에 녹색 쓰레기봉투가 가지런히 나열되었기 때문이다.


푸하하하

꺄르르르

야,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데?


그런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냉동실 쓰레기 예찬론자가 되어 버린다.

아냐. 이렇게 음식물 쓰레기를 바로 얼리니까 정말 좋더라.

대부분 실온에 그냥 두기 때문에 더러운 오물이 되어버리는데

바로 냉동시키면 싱싱한 채로 얼리기 때문에 깨끗해.

그리고 냄새도 나지 않고 날파리도 없고.

그냥, 이상태로 갖다 버리면 되니까 진짜 좋더라고.

너희들도 그렇게 해 봐~


다들 절레절레 손사래를 치지만 내 생각에는 분명 어느 한 녀석은 우리처럼 쓰레기를 얼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여하튼, 그때 이후로 우리 집에는 수박은 발도 들이지 못하고 있다.


Screenshot 2021-08-21 at 06.42.00.jpg


그런데, 어느 날, 집으로 모처럼 놀러 온 후배 부부의 손에 엄청 큼지막한 수박이 들려있었다. 나는 눈을 비비고 수박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어머나~!!

어서 오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후배 부부를 향해 인사를 건네고 있었지만 내 눈과 마음과 몸은 분명히 수박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아니, 눈치챘더라도 이해하겠지??


그 자리에서 시원한 수박화채를 만들어 내었고 후배 부부가 돌아간 후에는 냉장고에 예쁘고 우아하게 수박이 한자리를 차지했다.


오우~!

한 여름에 수박이 있다니...

정말 좋구나~


그렇게 이번 여름, 수박을 영접했다. 그리고 달라진 것이라면 음식물 쓰레기 분쇄기가 싱크대에 달렸다는 것. 수박 껍질을 잘게 썰어 분쇄기에 갈아주면 미생물의 먹이가 된다. 남편이 음식물 쓰레기 타령하기 전에 부지런히 수박 껍질을 잘게 잘게 썰어 쥐도 새도 모르게(?) 미생물 먹이로 갈아 주었다. 어찌나 즐겁던지...


이 정도로 흔적이 남지 않는다면 이제는 수박을 집으로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넌지시 남편에게 물었다.


자기야,

수박 요즘 가격이 저렴하던데 한 통 사자!


안돼!

그냥 처남댁한테 가서 먹고 와!


헉! 아직도 그는 수박에 대한 나쁜(?) 기억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 집은 언제쯤 수박을 냉장고에 넣고 먹을까.... 미생물 밥도 줘야 하는데...


나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그날 오후, 후배 부부의 손에 들려오는 수박을 보았다!


매거진의 이전글난, 페미니스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