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남편은 가볍게 황룡산을 다녀온다. 오솔길이 그리 높지 않은 까닭에 정상까지 올라가는 데는 20분이면 되지만 부족한 운동량을 채우기 위해 좀 더 먼 길을 돌아 집으로 온다. 땀으로 흠뻑 젖은 남편은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면서 자신의 옷가지를 조물조물 빨아 옷걸이 걸어 말린다.
'이때다!'
나는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손빨래할 옷가지를 하나 던져준다. 남편은 어차피 손세탁을 하는 김에 기분 좋게 노래를 부르며 빨래를 해 주는데, 여기서 세탁할 옷을 두 개 이상 주면 안 된다. 그도 사람인지라 화를 낼 게 뻔하기 때문에.
가끔 나는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어쩌면 이기적인 습관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우리 부부는 서로의 할 일이 딱히 구분되어 있지 않다. 아이가 없는 탓도 있겠지만 남편의 부지런함과 깔끔한 성격 때문에 아내의 역할, 남편의 역할에 선긋기가 없다.
특히 남편은 성장 과정에서 엄마의 고된 살림살이를 보면서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랐고 성인이 된 후에는 혼자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조리사 자격증까지 땄다. 그런 덕분에 결혼 후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것은 물론, 청소와 빨래 등의 가사를 함께 하면서 서로의 영역이라는 구분은 처음부터 사라졌다.
이런 남편과 함께 살면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게을러진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결국 마음과 달리 이기적인 행동과 습관으로 나타난다. 남편이 차려준 음식 앞에서 숟가락만 얹고 있거나 청소할 때 소파에 앉아 발만 들고 있기도 한다. 아무래도 나는 너무 편하게 살아가는 종족인가?
혹자는 '누려라'라고 할 것이고, 혹자는 '그래도'라는 말로 일축할 것이다. 아무래도 페미니즘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시대에 살다 보니 환경에 녹아든 하나의 삶의 방식일 뿐 그렇다고 나와 남편은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가부장적인 시대였다면 감히 생각도 못할 상황은 확실하다.
양궁 안산 선수, 숏컷에 여대생이라 페미니스트라구?
최근 도쿄 올림픽에서 한국 최초 3관왕을 차지한 양궁의 '안산'선수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안산 선수가 과거 자신의 SNS에 올린 남성 혐오의 오해 소지가 있는 발언과 숏컷 머리스타일 때문인데, 일부 반페니미즘을 지향하는 젊은이들이 안산 선수를 페미니스트라 지적하면서 강도 높은 비난을 이어가고 있다.
그녀의 SNS에 올린 문구 가운데 '오조오억', '얼레벌레', '웅앵웅'이 남성 혐오 문구라는 것, 거기에 짧은 머리를 하고 여대를 다닌다는 것이 이유인데 딱히 무엇이 문제인지 사실 이해하기 어렵다. 몇 가지 문구들은 안산 선수의 SNS를 도배한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아무 뜻 없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짧은 머리를 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라면 여성들은 모두 긴 머리여야 한다는 것일까? 더욱이 여대에 다닌다는 것이 페미니스트의 이유라면 예전 여중, 여고 시절의 여성들은 모두가 페미니스트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더욱이 안산 선수가 양궁에서 2관왕을 차지한 이후 불거져 나온 것으로 그 전에는 논란의 대상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관심조차도 없던 한 개인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지금이어야 할까. 또한 이것이 굳이 이슈가 될만한 문제가 아님에도 전 세계의 매스컴을 통해 방송되고 있다는 것이 왠지 낯을 붉히게 한다.
영국 BBC에서도 이 논쟁을 보도하며 공식 인스타그램에 '한국 양궁 선수인 안산이 짧은 머리 때문에 자국에서 비난을 받고 있다'라고 했고, 로라 비커 BBC 한국 특파원 역시 자신의 트위터에 '머리 모양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번 일은 자신들의 이상에 들어맞지 않는 여성을 공격하는 소수의 목소리에 의한 것이다. 한국이 양성평등 문제와 사상 최저 수준의 출생률을 해결하려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더러운 단어가 되어 버렸다'라고 지적했다.
아마 반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나는 그야말로 '사회적으로 매장' 당할 '페미니스트'에 해당할 것이다. 그것도 가장인 남편에게 빨래, 밥, 청소까지 시키는 악질 페미니스트. 거기에 나는 여중, 여고를 졸업을 했고 인생의 절반 이상을 숏컷을 하고 다닌 사람이기 때문에 확실한 페미니스트가 아닐까? 그렇게 하나하나 이유를 따지다 보니 안산 선수를 둘러싼 페미니스트 논란은 왠지 억울하고 안타깝기까지 하다.
어쩌다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이 더러운 단어가 되었을까?
페미니즘의 본래 뜻을 오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대가 흘러 원래의 취지가 변질되어 버린 것일까? 먼저는 페미니즘의 역사를 통해 진정한 '페미니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은 결국 남성 위주의 사회적 제도에 억눌리고 억압당하는 여성인권에 대한 문제이지 결코 머리가 짧고, 여대를 다니거나 남성 혐오 단어 사용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오랜 역사를 통틀어 볼 때 남성이 사회활동과 정치 참여를 주도해 왔다. 때문에 사회에 보편화된 남성 중심의 제도에 묶여 있던 여성들이 동등한 권리와 기회의 평등을 얻고 사회적, 정치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고 실현하는 운동을 펼쳤는데 이것이 '페미니즘'이다.
사실, 페미니즘의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다. 전체적으로 볼 때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페미니즘 운동은 19세기부터 1950년대까지 영국과 미국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여성들의 정치참여 문제가 이슈화 되었는데 이때 흑인들의 권리 신장을 위한 움직임도 함께 일어났다. 이로 인해 미국에서는 1870년에 흑인들의 참정권을 인정했고, 1920년에는 여성들의 참정권을 인정했다. 영국에서는 1928년 21세 이상 모든 여성이 남성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1세대 페미니즘이다.
2세대 페미니즘은 1960~1980년대에 일어난 것으로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벗어나자는 움직임이었다. 가장 먼저는 직장에서의 남녀평등이었다. 남성 위주의 관료제도와 사회제도에서 힘겹게 일하며 버텨내던 여성들은 임금 수준을 개선하고 노동환경을 개선하라고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가정에서 가사 분담뿐만 아니라 남성의 권위주의적 가부장제도에 대한 거부와 평등을 주장했다. 더 나아가 여성의 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배제하고 여성의 활동 범위를 사회 전반으로 확대하도록 했다.
영화 '헬프'(2011)나 '히든 피겨스'(2016)를 보면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문제를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당시의 여성들의 입지가 어떠했는지는 잘 보여준다. 가부장적인 남성 위주의 사회,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들, 여성이기에 제재를 당해야 했던 모습들이 인종차별 문제를 뛰어넘어 여성인권의 문제를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1990년대 이후 3세대 페미니즘은 백인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다는 비판에서 출발해 포스트모더니즘과 결합, 다양한 집단과 계층으로 확대되었다. 여기에는 성소수자의 권리 운동도 함께 일어나게 되어 '성적 차별'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사실, 아직도 직장 내에서, 사회에서 여성인권과 평등에 대한 문제는 해결해야 할 부분이 많다. 약자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에 대한 성추행, 성희롱의 문제는 툭하면 불거져 나와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은연중에 이를 이용하는 여성들도 없지 않은 것 역시 사실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 운전자는 죄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운전자'라는 죄목으로 수감된 여성들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2011년, 차를 직접 운전한 마날 알 샤리프는 왕실이 고용한 비밀경찰에 붙잡혀 담암 중앙교도소에 수감이 된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우주여행을 꿈꾸고 AI가 인간을 대신한다는 21세기 아닌가. 그런데 여성이 운전했다는 이유로 쥐도 새도 모르게 감옥에 갇히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다니...
이것은 공상이 아니라 바로 지구촌의 이야기이며 아직까지도 여성인권이 무너져있는 한 나라의 현실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왕국이자 이슬람을 믿는 종교국가로, 이곳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여성들은 '마흐람'이라는 제도에 묶여 남성들의 주관 하에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유일한 소유물인 냉장고에 자물쇠를 채우는 나라, 온몸을 가리는 니캅을 써야 하고, 여성 할례를 묵인하며 남성이 휘두르는 폭력과 성착취에도 반항할 수 없다.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은 물론이고 기회의 평등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적 차별과 여성인권 억압은 지금도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하고 풀어나가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짓밟힌 여성인권을 생각할 때, 무엇이 진정한 페미니즘인지 가늠할 수 있다. 머리가 짧아서, 여대를 다니기 때문에, 몇 마디 단어를 제멋대로 사용해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또한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 남성을 혐오한다는 것과 연관 지을 수도 없고 지어서도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남성과 여성의 성적 차이로 인한 기회의 박탈, 인권 억압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신체적인 다름을 존중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