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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Oct 06. 2019

꽁보리 밥과 고추장의 추억, 그리고 고혈압

내 남자 이야기(07)

(개구쟁이였던 남편의 어린 시절, 어려운 시간을 보냈던 우리의 이야기를 추억의 책장에서 단편을 꺼내 봅니다)


유달리 기억력이 좋은 것은 타고난 재능 같다. 남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릴 적 이야기를 대화까지도 기억하고 있으니 좀 별난 구석이 있나 보다. 그러나 때로는 희미해지기를 바라는 그런 기억들도 있다.

© lecreuset, 출처 Unsplash




내가 7살이었을 때, 우리 집은 방 한 칸이 달린 월세방에서 여섯 식구가 살았다. 그때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기 전이었다. 아버지는 안성 시골 촌구석에서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하고 고모할아버지의 입심으로 서울 **대학교 기관실 배관공으로 취직해 보일러실 돌리는 단순한 일부터 배우기 시작하셨다. 말단 직업이었던 만큼 급여라고는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지만 그나마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던 것에 보람을 느끼고 계셨던 것 같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우리 여섯 식구의 서울 생활은 말 그대로 밑바닥 수준이었다.


성북구 하월곡동 달동네. 월세로 들어간 집에는 수도시설이 없어서 공동 수도를 사용해야 했던 곳. 20리터 물 한 통을 당시 돈으로 5원을 주고 길어 왔다.

© derstudi, 출처 Unsplash


우리 집은 꽁보리밥을 주식으로 했다. 다만 일하시는 아버지 밥만 흰쌀밥으로 딱 한 그릇 준비해 아랫목 이불속에 고이 넣어 두었다. 엄마는 밥하는 기술이 정말 대단했다. 꽁보리와 흰쌀을 한 솥에 넣어 잘 분리한 다음 절대 섞이지 않도록 밥을 짓는다. 그래서 늘 아버지 드실 한 공기의 밥을 쌀밥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


때로는 이웃집 형과 누나들이 싸가는 도시락에서 흰쌀밥을 걷어내 쌀밥 한 공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유독 쌀밥만 먹어 국민 건강에 해롭다는 정부시책에 따라 잡곡 먹기 운동이 권장되던 때였다. 때문에 학교에서도 점심시간에 학생들 도시락을 일괄적으로 검사해 잡곡을 싸오도록 강제하기도 했다. 그래서 선생님의 검사를 피하기 위해서도 일부러 잡곡 섞은 밥을 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매일 아침 우리 집에서 벌어진 진풍경 하나. 집주인을 포함해 이웃집 형과 누나들이 자기들 도시락의 쌀 밥을 걷어내고 우리 집 꽁보리밥을 자신들의 밥 위에 살짝 덮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생긴 흰쌀밥은 아버지의 밥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배가 고픈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 michaljanek, 출처 Unsplash




어느 하루. 지워지지 않는 나의 기억 단편


어느 겨울 저녁이었다. 밖에서 추위도 모르고 실컷 놀다가 집으로 돌아온 내 몰골은 그야말로 거지새끼였다. 흙먼지로 꼬질꼬질한 얼굴과 손, 연신 흘리는 코를 소매 끝자락으로 닦아내 얼굴은 콧 자국이 선명하다 못해 시커멓게 도배가 돼있었다. 무릎을 꿇고 구슬치기를 하며 흙바닥에 기어 다닌 흔적이 시커멓게 온 몸에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그런 몰골을 보신 엄마는 특유의 욕 한 바가지와 함께 매서운 손매로 연신 나의 등짝을 때리셨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옷을 벗기고 더러워진 나를 씻기셨다. 추위가 그제야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날 저녁도 보리밥을 배식받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달리 내 밥그릇에 담긴 보리밥이 적어 보였다. 배가 고픈 탓일까. 아니. 그날따라 적어 보인 꽁보리밥을 보는 순간 더 배가 고팠다.


"엄마... 밥 쪼금만 더 주세요... 엉아보다 주걱에 올려진 밥이 적은 것 같은데... 반 주걱만 더 주세요..."


엄마는 나름대로 모두에게 공평하게 딱 한 주걱씩 배식의 규칙을 정하셨다. 그렇다 보니 나의 요구는 엄마의 성질을 건드리고 말았다.


"으이그!! 집구석에 있으면 되지, 나가서 지랄 맞게 뛰어다니니까 배가 금방 꺼지지!!! 다 똑같이 줬으니까 그런 줄 알고 주는 대로 먹어!!"


반찬은 고작 시뻘건 고추장이 전부였던 밥상, 나는 어린 마음에 밥그릇의 밥이 빨리 줄어드는 게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고추장을 밥 양만큼 비비면 엄마가 혹시 밥을 더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슥삭~슥삭~ 그리고 한 입 가득 밥을 넣었다. 아.... 정말 짜고 맵다...


"하~~ 쓰~~ 하~~ 헤~~~"


매운 기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혀를 내밀고는 물을 연신 마셔댔다. 머리는 빙빙 도는 것 같고 콧잔등에는 땀이 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있던 동생이 부엌에 계신 엄마에게 고자질을 해댔다.


"엄마~~!! 작은 오빠 보래요~!!"


부엌문을 열고 나를 보신 엄마는 곧바로 들어오시더니 내 등짝을 사정없이 후려갈기셨다. 아... 가엾은 내 등짝...


"이런 때려죽일 놈의 새끼가... 하다 하다 별 지랄을 다하고 있네~!!"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멋쩍고 속없는 나는 헤~ 웃으면서 엄마에게 한마디 했다.


"하~ 쓰~ 하아~ 맵다~ ㅎㅎ 근데, 엄마 난 원래 고추장 좋아해요.."


그날, 나는 한없이 얼얼한 입안과 더불어 엄마의 손 매질로 성할 것 같지 않은 내 등짝 때문에 이마에서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눈에서는 눈물이 났다. 그리고 내 마음도 왠지 눈물이 났다. 그건 매워서였을까, 아니면 어린 마음에 아련하게 자리 잡은 설움 때문이었을까...

© leeyoping0, 출처 Pixabay




그 때문이었을까. 우리 가족은 모두 고혈압이라는 성인병을 가지고 살아간다. 엄마도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 수술을 받으셨고, 아버지도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형도 뇌수술 두 번, 막내 가이나도 뇌출혈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나 역시도 고혈압으로 약을 먹은 지 오래다. 사업으로 부도가 나기 전,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28세 되던 때부터 고혈압 판정을 받고 시작된 혈압약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쭈욱~ 이어 오고 있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혈압 때문에 담당 의사는 마지막으로 체중조절을 해야 한다는 조언을 해 주었고 그 뒤로 정말 열심히, 징그럽게 운동 중이다. 참 고통스럽고 어렵다. 차라리 마누라를 위해 열심히 보험을 들어 놓고 사는 게 더 편할 듯하다.


"여보~ 마누라~ 보험 열심히 들어 놓을 테니 한 눈 팔지 말고 사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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