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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Oct 09. 2019

세 명의 시어머니와 종갓집 며느리 시집살이

내 남자 이야기(10)

(시어머니의 삶은 그리 평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그 시대에는 흔했던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여인으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없는 살림에 고단한 삶을 살아갔던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남편 이야기 속 어머니의 삶은 그러했습니다. 나에게 엄마는... 두 번째 글.)



엄마는 논산군에서 만석꾼 외동딸로 태어났다. 부잣집의 귀염둥이로 유모까지 있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나 공산군이 밀고 내려왔을 때, 잘 사는 지주라는 이유로 부모님은 공산군에게 잡혀가 무참히 처형을 당하셨고 엄마는 어린 나이게 홀로 남겨졌다. 그 후로 모든 가산은 어르신들의 손에 다 흩어지고 엄마는 친척 집에 얹혀 업둥이 맏딸로 살게 되었다. 그 집이 바로 내가 방학 때마다 내려갔던 외갓집이다.


어렸을 때, 외갓집에 가면 동네 어르신들이 하시던 말씀을 기억한다.


"니가 그 기순이 아들이여? 아이고~ 불쌍한 것...!! 그렇게 구박받고 고상만 하더니... 이렇게 아들놈은 잘 낳았네 그려~!"


나로서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꺼내시며 내가 자리를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을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같았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정말 나를 예뻐하시며 잘 챙겨주셨다. 그래서 나는 방학 때마다 내려가고 싶어 할 만큼 외갓집을 좋아했는데 엄마를 학대하고 구박했다니... 전혀 믿기지 않았다.

© tae1014, 출처 Pixabay


사실, 엄마는 초등교육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15살까지 외가댁에서 시키는 대로 일만 하다 16살에 얼굴도 모르는 아저씨에게로 팔리듯 시집을 온 것이다. 당시에 아빠는 26살, 16세 소녀에게는 징그러운 아저씨였을 것이다.


나는 성인이 돼서야 엄마가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고생을 많이 하셔서 눈이 알찍 나빠져 글이 안 보이는 것으로 생각했고 엄마도 그렇게 이야기해 주셨으니까... 그러나 엄마는 말 못 할 사정으로 가슴에 멍을 지고 살아가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기에 더욱 자존심 하나로 버티며 살아오셨을 엄마...


그렇게 아픈 어린 시절의 흑역사를 간직했음에도 엄마는 셋방살이하는 내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외삼촌을 10년이나 학교 뒷바라지를 하셨다. 그것은 내게 또 다른 흑역사를 가져왔다.


'속없는 할망구 같으니... 그 덕에 내가 외삼촌에게 10년을 맞고 살았구만...'

© jeonsango, 출처 Pixabay


엄마의 시집살이 역시 평탄치 않았다. 종갓집 종손으로 경주 김 씨 계림군파임을 자랑스럽게 여기시며 가문의 혈통을 따지길 좋아하셨던 친할아버지. 그런데 내가 세 살쯤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의 삶은 엄마를 정말로 혹독한 시집살이로 내몰았다. 할아버지는 가문의 혈통을 무시한 채(?) 얼마 되지 않아 둘째 할머니를 데려오셨다. 둘째 할머니가 낳은 딸까지 데리고 들어와 엄마를 괴롭게 하더니 결국 1년도 채 안돼서 집에 있는 패물과 돈을 몽땅 털어 도망갔다.


그 후로 할아버지는 다시 셋째 마눌님을 모셨다. 이름은 황금순. 나는 할머니라고 부르는 대신 여사라는 칭호를 쓰기로 했다. 성질이 대단히 고약해서 우리 남매를 많이 혼내셨다. 그러니 엄마는 오죽하셨을까. 황여사의 기세에 눌려 답답하고 힘든 시집살이를 이어가야만 하셨다. 덕분에 카사노바 영감님은 여사님의 등쌀에 '꼼짝 마라' 신세가 되었지만. 그러나 이것은 고생의 시작에 불과했다. 여사님은 암에 걸렸고 10년이 넘도록 투병생활을 하다 돌아가셨다. 그 모든 병수발과 고생의 중심에 항상 엄마가 있었다. 아직은 젊은 나이였는데... 엄마는 그 모진 고생을 다 인내하고 있었다. 그것이 경주 김 씨 종갓집 종손 며느리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 여기셨다.


그런데 그 후에도 카사노바 영감님의 버릇은 여전히 엄마를 괴롭게 했다. 경로당에서 만난 할머니와 살림을 차리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통에 엄마가 많이 언성을 높이셨다. 한 번의 시집살이도 힘든데 엄마는 세 번이나 시집살이를 하면서 재산도 잃고 온갖 병수발까지 들며 안 해도 될 일들을 겪으신 것이다. 그런데 또다시 시집살이라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는 치매가 발병했고, 거기에 폐병까지 생겼다. 수년간 이어진 병치레로 가족 모두가 지치고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할아버지와 함께 약을 타기 위해 보건소를 다녀오시던 중 밀리는 인파 속에서 할아버지의 손을 놓치셨다. 그 뒤로 할아버지는 서 있던 버스를 목적도 없이 타셨고 엄마는 할아버지를 잃어버리셨다. 곧바로 실종 신고를 하고 신문에 광고를 냈다. 온 서울과 근교까지 모두 찾아 헤매고 다녔다. 엄마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손을 놓친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죄책감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다.


결국, 보름 만에 할아버지는 고양시에서 동사된 채로 거리에서 발견되었고 우리는 원당 연세병원 시체 보관소에서 할아버지를 보게 되었다.


"노인네.... 그렇게 가족들 고생시키고, 특히 종부인 엄마를 그토록 애만 먹이더니... 결국, 돌아가시는 날까지 힘들게 하시네... 엄마가 그렇게 힘들여 쌓아 놓은 공든 탑까지 다 허물어 뜨리고..."


엄마는 징하게 견뎌내셨다. 세 번의 시집살이를 살면서도 종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셨다. 치매와 폐병으로 가족을 힘들게 하셨던 할아버지를 애지중지 그렇게 모셨다. 그런데... 그 모든 공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할아버지를 안성 선산에 안장한 후에는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가친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수모도 겪으셔야 했다.


"애구... 그리 잘난 척하더니만... 종부가 제대로 모신 것 맞아??"


정말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는 말들을 견뎌내셨다.

© jeonsango, 출처 Pixabay


이 모든 일들이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지기 1년 전이었다. 다행히 엄마는 수술 경과가 좋아 중환자실에서 3개월 치료 후 퇴원을 하셨다. 그러는 동안 나는 엄마의 병수발을 하면서 엄마를 더 많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왜 그렇게 지독하게 살아오셨는지, 왜 그토록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셨는지... 그것은 엄마를 지탱하게 해 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엄마에게 풀리지 않는 감정들이 쌓여있다. 막연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편애, 그리고 형과의 차별, '왜 나만...?'이라는 의문이 아직 가슴에 응어리처럼 남아있다. 엄마가 살아온 힘겨운 삶에 대한 울분과 억눌린 감정들을 유독 나에게 표출하신 것 같아 가끔은 따끔거리며 가슴을 찔러온다.


나에게 엄마는... 아직 풀리지 않는 마음의 벽으로 서 있다. 그 어렵고 힘든 삶을 이해하면서도 허물어지지 않는 벽으로 서 있다. 그 벽을 언젠가 허물 수 있는 날이 올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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