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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Oct 10. 2019

말갈이 일병과 군대 동기 송 이병

내 남자 이야기(11)

(1980년대, 민주화 시위로 어수선했던 서울거리는 최루탄 가스와 시위대와 경찰들의 대치가 한창이었습니다. 그 시절, 군대 역시 민주화가 되기 전이라 지금과는 많이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어두웠던 그 시절, 그땐 그랬지...라고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87년 군번이었던 나는 아주 특별한 계기로 군에 지원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태릉 **사관학교로 발령이 났고 최고 사령관인 장군의 직속 비서실에 배치되었다. 이곳에서 나의 보직은 당번병, 한마디로 '따까리'로 불렸다. 좋은 말도 있을 텐데 굳이 그렇게 불렀다. 본부 근무대장은 이병이었던 나를 김 일병이라고 불렀다. 포천 **군단에 있을 때부터 관례대로 일병이라 불렸던 나는 처음 **사관학교 정문으로 들어올 때 일병 계급장 때문에 헌병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를 뻔했지만 그것을 무마시켜 준 사람이 본부 근무대장이기도 했다.


본부 근무대장은 군대 동기가 요리병으로 있다면서 공관 요리병으로 추천을 해 주었다. 물론 결정권은 내게 있었지만 동기 좋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입이 까다로운 장군 때문에라도 나와 잘 통하는 동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요리병 송 이병을 장군이 있는 숙소인 공관으로 불러들였다.

사실, 나는 계급이 작대기 하나인 이등병에 불과했지만 최고 사령관이 추천했다는 엄청난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어서 김 일병으로 불리며 군 생활을 시작했다. 덕분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포전 **군단에서부터 이등병임에도 불구하고 말갈이 일병 마크를 달고 헌병대와 기간병들을 휘어잡고 다녔는데 태릉으로 발령 난 후에도 여전히 같은 행동을 하고 다녔다. 공관 시설병, 보일러병, 요리병, 운전병, 기타 청소 및 화훼 관리병, 방위병까지 직접 체크하며 일정을 관리했다. 모든 장교들이 비서실의 끗발이라는 기운에 눌려 공관 당번병인 나를 어렵게 생각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공관에서는 계급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송 이병은 언제나 투덜댔다. 나 때문에 군 생활이 꼬였다고. 그러나 전방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동기가 생긴 나는 그저 좋기만 했다. 부대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어 훈련받는 기간에 따라 동기 군번이 달라진다. 전방에서는 15일 단위로 동기 군번을 끊었던 까닭에 나는 막내 군번으로 언제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거의 매일을 고참에게 맞거나 기합을 받고서 잠을 잤다.


외로웠던 나에게 동기는 무척이나 좋은 친구였다. 같이 술도 마시고 공관에 심어진 과실수로 제철 과일주를 담아 놓고 숙성 기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지하 보일러실에서 몰래 마시기도 했다. 거기에 송 이병이 만든 고기 안주가 어찌 그리 맛있던지. 입이 짧았던 내가 그 뒤로 고기를 영접하게 되어 사회성이 쑥쑥 자라는 계기가 되었다.


제5공화국에서 제6공화국으로 넘어가던 시절


참 힘든 시기였다. 군대를 가기 전, 광화문과 종로 일대는 온통 민주화를 위한 데모 시위가 한창이었다. 나 또한 친구들과 최루탄 가스를 맡으며 목이 쉬어라 민주화를 외쳤다. '민주 화합! 민주 통일!' 그렇게 민주에 대한 열망과 갈증이 깊었던 시절이었다.


군에 있는 동안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김대중 후보, 김영삼 후보, 노태우 후보 이렇게 삼파전으로 좁혀지며 정치계는 그야말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비도덕성과 정통성의 결여, 비민주성을 비판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거세졌고 직선제 개헌이 요구되었다. 그때.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원이 국민들의 요구인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여 6.29 선언을 발표했다. 사회적 분위기는 군출신 노태우 후보 쪽으로 기세가 기울어졌다.

나와 송 이병도 ** 사관학교에서 지정한 투표소에서 대통령 선거 투표를 치렀다. 투표 당일, 연병장에서는 기합소리와 얼차려 받는 병사들의 함성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관학교 본부까지 들릴 정도였다.


"어제는 불순한 공산주의자들이 수십 명 발생했다!! 저기! 연병장 끝 축구대가 보이나!! 땡크가 보이나!! 크게 한 바퀴 돌아 이곳까지 선착순 3명이다! 실시!!"


병사들은 20kg이 조금 넘는 완전군장을 한 상태에서 얼차려를 받고 있었다. 전날 투표 장소에서 집권당 후보인 노**후보 대신 소신껏 타 후보를 찍었다는 이유였다. 당시, 군대에서의 투표는 자유롭지 못했다. 투표를 한 후, 보안대를 거치면서 누가 어떤 후보를 찍었는지 귀신같이 밝혀내 각 부대 관계자들이 부대 내 군기 교육대에서 병사들에게 얼차려 훈련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분명 누가 봐도 보복성이 짙어 보니는...(적어도 병사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시간부로 그들의 군생활은 꼬일 대로 꼬인 것이다.


송 이병의 군 생활이 꼬인 이유도 이런 불합리한 체제에 굴하지 않았던 데서 비롯되었다.

(송 이병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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