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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Oct 11. 2019

군대 부재자 투표, 송 병장의 소신 투표

내 남자 이야기 (12)

(군대 부재자 투표가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 무언의 압박이 존재했던 군대에서 소신 투표를 한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꼬일 대로 꼬인 군 생활을 예고한 송 병장의 소신 투표 이야기)


송 이병과의 인연이 시작된 어두운 군대 시절 두 번째 이야기


부재자 투표 서류가 도착한 장군 공관에서도 서서히 비상이 걸렸다. 요리병 송 이병은 전라도 무안 출신, 시설대 장 상병은 충청도 조치원, 운전병 정 일병은 서울특별시, 일호차 말년 병장은 부산, 숙소차 운전병은 서울특별시, 그리고 나.. 서울특별시. 이렇게 팔도에서 올라온 청년들이 부재자 투표를 실시하게 됐다.


비서실과 공관병들의 투표가 있던 날. 본부 근무대장과 중대장 그리고 하사관이 장병 한 명 한 명을 밀착해 관리 차원에서(?) 투표를 실시했다.


"이 시간은 우리 부대의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장군님의 직속 부하들이 투표를 하는 날이다! 김 일병 자네는 군단에서 장군님이 직접 선발해 추천한 병사니까 관계없지만, 나머지는 나와 하사관들이 투표를 체크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송 이병은 특별히 본부 근무대장님이 직접 투표를 체크하게 될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그 시절에는 일상적으로 발생했다. 지금이야 철저하게(?) 사생활이 보호되는 시절이 됐지만 당시에는 투표 하나도 쉽지 않았던 것이 바로 군대였다.


우리는 투표장으로 향했다. 한 명씩 투표장으로 들어가 투표를 했다. 그리고 내 동기 송 이병이 들어갈 차례가 되었다. 기표소에 들어간 송 이병은 기표소에 본무 근무대장과 함께 서 있었다. 모든 공관병들이 일대일로 밀착 관리하는 상급자들과 함께 기표소로 들어갔다. 유일하게 상급자 없이 투표를 한 것은 나 혼자였다. 투표를 마치고 나온 나는 송 이병과 본부 근무대장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둘 다 무겁게 내려앉은 표정이었다. 타들어가는 내 마음은 더욱 조마조마 해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송 이병!'

© element5digital, 출처 Unsplash


투표 전날, 송 이병에게 신신당부했었다.


"송 이병아~ 그냥 눈 꼭 감고 노태우 후보 찍자.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영감이 알면 여럿 죽을지 모르니까 생각 잘하고..."


"흐미... 참말로 거시기하네~ 나는 우리 선상님 아니면 안된당께.. 김대중 선상님만이 진정한 대통령 깜이제~!!"


평소에도 김대중 후보에 대한 말만 나오면 입에서 침이 튈 정도로 열정적으로 대변하던 송 이병. 결국 자신의 소신대로 쿡! 김대중 후보 이름 옆에 도장을 찍었다.


"민주주의 아닙니까! 나도 소신껏 찍어야 제~" 


옆에 서 있던 본부대장은 어두운 표정으로 일관했고 사실을 확인한 대대장 이하 중대장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잠시 어둡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송 이병의 투표를 마지막으로 모두 재빠르게 소속 위치로 돌아갔다. 그 순간만큼은 문제가 커 보였던 것이 사실이지만 송 이병이 장군 직속 공관 요리병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아무도 문제를 삼을 수 없었다. 그랬다. 비서실과 공관병들의 끗발이라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던 시대. 다행인지 송 이병은 그렇게 잘 넘어가는 듯 보였다. 3개월 뒤 내무반으로 다시 내려가기 전까지는...

© 8moments, 출처 Unsplash


비서실 소속의 나 그리고 공관 소속의 송 이병, 우리는 말단 사병이었음에도 보이지 않는 계급장을 달고 있는 덕분에 어깨는 하늘로 치솟고 기고만장함으로 군 생활을 했다. 항상 군복 대신 사복을 입었고, 머리도 길어서 장교 머리를 하고 다녔다. 나름의 이유를 잘 대기만 하면 외출도 매일 나갈 수 있었다. 나와 송 이병은 한 쌍의 날라리였다. 장군이 출타하는 낮 시간에는 가끔씩 명동 한복판을 거닐며 다방에서 커피도 마셨고, 종로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복귀하는 등 어떻게 보면 꽃 길 같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 러. 나. 투표 이후, 보통 사람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 송 이병의 군 생활은 그야말로 첫 끗발이 개 끗발이 돼버렸다. 부대 내에서는 이미 불순 투표의 대명사로 소문이 나 장교들의 타깃이 돼 있었다.


"송 이병, 공관에서 나오기만 해라... 사소한 거 하나라도 걸리면 두고 보자..."


송 이병은 장군의 건강 문제로 요리병을 바꾸라는 지시에 따라 몇 개월 만에 장교 식당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결국 사소한 일에 연루가 되어 육본 영창 행으로 고생하게 됐다.

© Atlantios, 출처 Pixabay


나는 정치를 몰랐다. 그저 명령받은 직무가 중요했고 장군을 잘 보필하는 것이 충성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내가 받은 보직은 다른 장병들과는 다른 특별함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나는 당시의 당선자에게 솔직한 한 표를 던졌는지 그것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언의 압력으로 당선자에게 투표를 하도록 권유했던 장군의 표정을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많이 비겁했다. 특히 송 이병의 신념에 찬 행동에 비춘다면...  그때 송이병은 누구를 찍었냐고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누구를 찍었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송 이병! 그때는 내가 정말 비겁했다. 너의 용기와 신념에 새삼 존경심이 든다..."


지금 같은 하늘 어딘가에서 희끗희끗 흰머리를 염색하며 나이 들어가고 있을 내 동기 송 병장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자랑스러운 내 동기, 송 병장.

어느덧 세월이 흘러 반백이 훌쩍 넘긴 나이가 됐다. 

당신과 내가 만들었던 추억들이 이렇게 새록새록 떠오를 때마다 

네가 정말 보고 싶다.


비록 한없이 어려웠던 시절, 

자존심 때문에 당신의 결혼식에 가 보지 못하고 인연이 끊어졌지만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송 병장, 너의 존재가 살아있다.

보고 싶다. 친구...

둘이 같이 어울려 다니던 종로에서 소주 한 잔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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