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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Oct 16. 2019

첫 사업 그리고 첫 직원 용이

내 남자 이야기 (15)

(드라마를 보고 있자면 가슴이 조여 오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어쩜 저런 일이 있을까.. 긴장감도 들고 애타는 마음에 다음 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런 이야기들은 모두가 우리 삶의 일부분입니다. 드라마틱한 삶의 이야기... 그것이 바로 내 주변의 이야기 아닐까요?)


나는 송 병장이 어렵게 마련해 준 200만 원과 알바를 하면서 모아둔 돈으로 내 인생의 첫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사실 사업이라기보다 장사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은평구 역촌동에 위치한 3층짜리 주택 지하실에 사무실을 얻었다.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15만 원. 창고로 쓸 만큼 내부가 넓었지만 지하실의 습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작은 냉동고 하나, 전화기 한대, 책상 하나를 들여놓은 게 고작인 사무실. 나중에 알고 보니 방수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벽을 통해 물이 스며들어 바닥이 온통 물바다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몇 년을 보내야 했다.


경험도 거래처도 자금도 없었던 나는 젊음 하나만을 의지한 채, 열심히 발품을 팔았다. 덕분에 독산동 도축시설 내에 있는 협진 축산과 구두 계약을 맺고 냉동 돈가스를 직접 떼어다 납품하게 되었다. 당시에 냉동 돈가스 120장이 들어 있는 한 박스의 매입 단가는 12,000원. 그리고 매출 단가는 48,000원이었다. 그렇게 물건을 떼다 납품하면서 자연스럽게 매출도 늘어갔다. 나중에는 거의 매일 새벽에 오토바이로 물건을 배달할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일손이 필요할 즈음이었다. 가끔씩 들러 식사를 하거나 맥주 한 잔씩 마시던 레스토랑에 여느 날과 다름없이 들렀다. 응암동 서부병원 앞에 위치했던 옛날 레스토랑. 나는 그곳에서 돈가스 안주를 시키고 맥주를 마시는데 3병이면 족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특히 그곳은 저녁 8시부터 신청곡과 팝송을 불러주는 통기타 가수가 있었다. 비록 이름 없는 아르바이트 생이었지만 분명 내 눈에는 가수였다. 좋아하는 노래를 신청하고 가끔 따라 부를 수 있는.


나는 그곳에서 웨이터를 하는 젊은 청년과 레스토랑에 거주하며 매상을 올리는 소위 '새끼마담'과 친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앉아 술시중을 들며 안주 매상을 올리더니 어느새 오빠 동생 하는 사이가 되고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사귀는 사이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웨이터 용이는 당시 알아주는 신문사 편집국장이었던 아버지가 이혼한 후 고1학년 때 가출했다. 그리고 안양에 살던 연주는 엄마가 재혼한 후로 새아빠 사이에서 갈등이 커져 가출했다. 그녀는 중 1학년 어린 나이로 가출해 인신매매를 당했다. 그리고 지금의 레스토랑까지 우여곡절 끝에 오게 됐는데 그녀를 데려온 값 때문에 연주는 빚을 갚아야 한다는 명목 하에 급여는 생각지도 못하고 감시를 받으며 일을 해야 했다. 지금은 16세. 시간이 흘러 그나마 자유로운 편이라고.


동병상련의 처지를 이해하듯 두 사람은 급속도로 마음을 열었고 연인으로 발전했다. 서로의 형편을 잘 알기에 용이는 레스토랑 구석방 하나를 얻어 연주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용이는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형님, 이따 밤늦게 들려주실래요? 저희들한테 늘 잘해 주셔서 업소 마감하고 제가 술 한 잔 대접하고 싶어서요.."

"그래? 업소 사장은? 괜찮아??"

"강북에도 술집이 하나 있는데 오늘은 마감하러 가서 못 온데요... 거기가 장사가 잘돼서 여기는 요즘 관심도 없어요."


그리고 나는 자정이 지나서 레스토랑으로 찾아갔다. 용이와 연주는 기다렸다는 듯 안주와 술을 내오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모두가 살짝 취기가 올라 덥다고 느낄 때 즈음, 용이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형님~! 저 이제 정신 차리고 싶어요... 저... 형님 사업하는 곳에서 일하면 안 될까요? 저 오토바이도 잘 타고, 중국집 배달도 해서 냉동식품 구하는 곳도 많이 알아요."


나는 갑작스런 용이의 말에 술이 확~ 깼다.


"... 그럼 저 친구는? 둘이 사귄다며.."

"그래서 제가 먼저 자리 잡고 이 친구 데리고 나가서 같이 살려구요..."


둘이 같이...?

짧은 내 인생 역사에서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 그런데 나는 이들의 부탁을 거절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들의 인생에 혹시 방향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나의 첫 직원과의 만남은 자정이 넘은 어느 허름한 레스토랑 술자리에서 시작되었다. 어쩌면 드라마 속 이야기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다음날부터 업소 상황은 심각하게 돌아갔다. 용이는 내가 직원으로 채용하겠다는 말에 용기를 얻어 바로 업소를 그만두겠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연주와 사귀는 사이라는 것을 눈치챈 사장은 연주에 대한 감시가 더욱 심해졌다. 급기야는 업소가 문을 닫은 후에는 아예 밖에서 문을 잠그고 퇴근해 버렸다. 사장은 용이 집안이 나름 잘 나가는 것을 알고는 용이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지만 연주에게는 가끔 손찌검도 했다. 겁을 먹은 연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만 했다. 애초에 계획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용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몰래 밖으로 나와 나에게 공중전화로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며칠 동안 나는 용이의 보고를 받으면서 서로 상황을 체크하며 굳은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왜 그랬을까... 아마 이 또한 내 젊은 날의 치기 어린 행동 이리라. 그러나 그날을 후회하지 않는다. )


용이와 나는 마감날을 D-day로 잡고 그날 새벽 3시 레스토랑으로 찾아갔다. 사장은 이미 퇴근한 후였는데 밖에서 걸어 잠근 자물쇠가 아주 튼튼하게 잠겨 있었다. 나는 준비해 간 연장으로 자물쇠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용이와 연주는 입을 수 있는 옷가지 몇 개만 가방에 싸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얇은 티셔츠에 파자마 차림의 둘은 양말도 신지 않고 슬리퍼만 신은 채 그곳을 탈출했다. 어두운 새벽 거리를 질주하듯 달려 업소에서 멀리 떨어진 모래내 여관에 두 사람을 투숙시켰다. 그리고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긴장감이 풀리며 날이 밝아 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는 곧바로 보증금 50만 원에 5만 원짜리 월세방을 구하고 간단한 살림살이를 구하기 위해 모래내시장을 돌아다녔다.


"몇 달간 여기서 살면서 업소 사장이 잠잠해질 때까지 지켜보자... 용이는 형 사무실로 출근하고. 오토바이 한 대 사놓을 테니까. 그거 타고 출퇴근해라. 연주, 너는 한두 달 동안은 꼼짝하지 말고."



그렇게 나의 첫 사업은 시작되었다. 용이도 열심히 일을 해 준 덕분에 시작부터 매출도 늘고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비록 구멍가게 수준이었지만 나에게는 사업인 만큼 최선을 다했다. 주력 상품인 냉동 돈가스 맛도 좋았고 이윤도 나름 괜찮은 편이어서 영업력만 뒷받침돼 준다면 희망이 있다.


나는 새벽에 독산동에서 물건을 떼다 냉동고에 채우고 낮에는 식당을 돌아다니며 영업을 했다. 주문이 들어오면 용이가 배달을 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퇴근할 무렵, 거래처를 돌며 수금을 하면 하루 일과는 마무리가 된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한 주가 가고 한 달이 지나갔다. 바쁘기는 해도 퇴근 후 밥 한 끼, 술 한 잔, 마음 편하고 넉넉하게 마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집에도 얼마 되지 않지만 생활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감사했다.


용이네도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가끔 업소 주인과 마주칠까 봐 전전긍긍해하던 불안감도 조금씩 사라졌다. 게다가 레스토랑은 그 일이 있은 후 두 달만에 주인이 바뀌어 이제는 완전히 자유를 찾게 되었다.


(용이와 연주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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