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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Oct 22. 2019

목욕탕 그 남자

내 남자 이야기(18)

20여 년 전 부산 출장 때 일이다. 당시 일주일에 4일 정도 지방 출장이 잦았던 나는 피곤함을 묻으려 고속버스를 주로 이용했다. 특히 부산 출장이 있는 날에는 반포 고속터미널에서 부산행 막차를 타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새벽 5시경 노포동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해운대에 있는 사우나를 향했다. 따뜻한 탕 안에서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잠시의 여운 때문에 그곳을 늘 찾아갔다.

             

Pixabay


그날도 그렇게 해운대 사우나를 찾았다. 탈의를 하고 욕탕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 바다가 잘 보이는 나만의 지정석을 눈을 들어 쳐다보았다. 그런데 웬 손님이 옷을 입고 탕에 앉아 있는 것 아닌가! 전날 마신 술이 덜 깬 나는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왔다.


마침 바다가 훤하게 내다 보이는 창 너머로 아침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눈이 부셔 제대로 뜰 수 없어 온갖 인상을 찌푸리고 노려보듯 탕 안을 쳐다보며 화를 냈다.


"아~ 짜증 나... 여기 옷 입고 탕에 들어간 사람 있어요. 얘기해서 불러 내세요!!"


그 소리를 듣고 종업원이 들어와 확인하더니 그냥 나가버렸다.


"아저씨!! 그냥 나가면 어떡해요? 이 사람 한국말 모르나 본데 얘기해서 내보야죠!"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사우나 주인에게 소리쳤다. 그런데도 귓등으로 듣는 건지 고개를 돌리더니 못 들은 척했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내가 아는 짧은 외국어로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영어로, 다음에는 일본어로... 물론 기분 나쁜 어투가 잔뜩 묻어있는 목소리로 한참을 성토했다.



내 얘기가 끝난 후에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나갔는지 안에 있던 손님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탕에 옷을 입은 채 앉아있던 그 남자가 서서히 일어나며 탕 밖으로 나와 성큼성큼 내 앞으로 걸어왔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물속에 잠겼던 거대한 주인공이 조용히 그리고 깊음의 물결을 일으키며 수면 위로 나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등 뒤에서 비치는 햇살은 그 남자의 덩치를 더욱 또렷한 윤곽을 드러내 주고 있었고 검게 드리운 그림자만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건 뭐지? 할 말을 한 것 같은데? 점점 정적이 흐르고 목이 말라온다. 숨은 잘 쉬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 시야에 가까워질수록 그는 아래위 국방색 반팔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중간중간 붉은색으로 포인트가 들어간 옷.



그런데...

술이 덜 깬 내 앞으로 아주 가까이 다가온 순간, 나는 거품 수건과 목욕 바가지를 들고 조용히, 앉아서 씻는 샤워꼭지 앞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그의 온몸은 용문양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겨있는 문신이었다. 용머리와 꼬리가 온몸을 휘감듯 화려하게 새겨 넣은 그 남자는 누가 봐도 일본 야쿠자였다. 사우나 주인은 가끔 일본 야쿠자 중간 보스들이 부산에 여행 올 때 들린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어쩐지 처음부터 사람들이 욕탕 구석에 앉아서 조용히 씻더라니...


"스미마셍... 혼또니.. 스미마셍..."


이런 젠장, 그의 온몸에 그려진 반팔과 반바지 앞에 한 없이 작아지는 나를 발견한다.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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