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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Oct 23. 2019

머슴이 된 서방님(#01)

내 남자 이야기 (19)

이런 얘기를 해도 될까? 뭐, 워낙 많은 이야기들이 있으니...


대부분의 남편들은 과거 여자 이야기를 가슴에 묻고 살거나 결혼과 동시에 강제 삭제해야 한다. 아내들은 남편의 남자 친구 이야기는 좋아해도 여자 친구 이야기에는 몹시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 과거 속 여자들에 대해 웬만한 것은 다 이야기해 주었다. 속 알 머리 없다고? 그게 무슨 소용이지? 아내를 만나기 전의 일들인데...


나는 아내를 만나고 자연스럽게 머슴이 되어갔다. 머슴에게 더 이상 이성은 필요치 않다.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만나 결혼하고 살다 보니 한 명도 버겁다.


어느 날, 집사람의 블로그를 눈팅하면서 우연히 보게 된 포스팅이 눈에 들어왔다. '사랑하는 아내에게...'라는 표현으로 수놓아진 글에는 본인의 건강이 나빠진 탓에 가장이 되어버린 아내를 도와 가정 주부로서 살아가는 남편의 이야기가 구구절절 녹아있었다. 청소, 요리, 세탁 등 집안일을 하면서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글을 보며 집사람에게 말했다.


"난 이 분과 많이 다른데... 내가 알아서 손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쓰레기 버리고 음식도 만들어 바치고... 이것저것 다 하는데 당신은 아무것도 하는 일 없잖아... 뭐 이런 불공평한 일이 있어?? 아무래도 당신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구먼..."

© marla66, 출처 Pixabay


나는 아내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른다. 내 폰에도 성과 이름을 그대로 적어 '***양'이라고 저장되어 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익숙한 나에게는 '여보'라는 호칭은 굉장히 낯설고 징그럽다. 그 말이 싫다. 그래서 아내는 결혼 초부터 주욱 '서방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나도 그냥 이름을 부른다.


늦은 나이에 만나 남들보다 오래 함께 하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보통처럼 그렇게 호칭을 부르고 싶지 않았다.


결혼 초, 당연히 나를 닮은 2세를 낳을 거라는 생각에 성스럽고 지혜롭고 건강한 내 자녀의 모친이라는 뜻으로 '성지 건모'라고 저장해 두었다. 그러나 너무 거창했나? 우리는 여전히 한 지붕 아래 둘만 살고 있다.


40대 중반이 되면서 마음속에 저장되었던 '성지 건모'를 지우고 처음 만났던 그때를 이어가기 위해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운명의 끈을 놓아주면서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여보'라는 호칭에 낯설다. 그렇게 불러볼 기회를 놓아주었으니까.


"내가 죽기 직전에 꼭 '여보'라고 한 마디 할 거야~! 그리고 우리 같이 떠나자!"


아내는 항상 영혼의 여행을 함께 떠나자고 말한다. 건강하게 지금의 모습으로 살다가 그렇게 가자고.  물론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지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될까. 그래서 나는 늘 아내에게 이야기한다.


" 보험 많이 들었으니까 다 타서 다 쓰고 즐겁게 더 놀다 와~"


나는 스스로 아내의 머슴이 되기로 했다. 보험도 많이 들어놓고 살 수 있는 집 한 칸 마련해 두고. 그리고 사는 날까지 이렇게 ***양의 머슴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음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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