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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Oct 24. 2019

머슴이 된 서방님 (#02)

내 남자 이야기 (20)

(머슴이 된 서방님 (#01)을 이어 이야기합니다)



내가 아내를 만난 것은 2001년 12월이었다. 아내는 차를 마시러 나왔다가 삼성동 코엑스 전시장에서 회사 상품 관련 브리핑을 하던 나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이 남자 괜찮은데...?'


뭐 그때는 한 인물 하긴 했었지.


대학을 들어가자마자 학생들만 가르쳤던 아내의 눈에는 깔끔하게 차려입은 내 모습이 제법 그럴싸해 보였던 모양이다. 직원에게 내 명함을 받고 며칠 후 전화를 걸어 대뜸 만나자고 했다. 수많은 명함이 뿌려진 가운데 일 때문에 상담차 걸려온 것인 줄로만 알았다.


약속 장소에서 만난 아내는 그저 공부만 할 줄 아는 수더분한 대학원생처럼 보였다. 첫인상이었다. 특별한 내용 없이 앉아있는 것이 짜증 났다. 워낙 바쁘게 살아가며 걷는 시간조차 아까워 뛰어다녔던 때였으니까. 그래도 숙녀 앞이라 예의상 한 시간은 앉아서 커피 한 잔을 뚝딱 마시고 일어났다. 다시 만날 일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먼저 뒤돌아 서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까마득히 그 커피숍의 숙녀를 잊고 있었다.



일주일 뒤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목소리를 듣고 그때 그 여자를 떠올렸다. 당시에 나는 목소리나 전화번호를 말로 듣기만 해도 외울 수 있을 만큼 기억력이 좋았다. 이번에는 다짜고짜 저녁을 사준다고 약속을 잡았다. 마침 거의 매일 있던 저녁 약속이 그날따라 펑크가 나 있던 터라 시간을 조절하기 애매한 날이었다.


"어차피 저녁은 드셔야 할 거 아닌가요? "

"네... ( 사주겠다고 애원하는데.. 밥 한 끼 먹는다고 무슨 일이야 있겠어...)"


그런데 그것이 내가 머슴으로 전락하는 인생길을 걷게 된 터닝포인트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는 강남 선릉역에 있는 **횟집에서 만났다. 횟집에 들어서 그녀를 본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분명 전에는 수더분한 대학원생이었는데.. 아니 오히려 아줌마 같은 인상이었는데... 그녀는 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머리는 숏커트에 귀 뒤로 머리를 넘겨 귀가 드러났다. 넓은 뿔테 안경을 벗고 화장을 했는데 귀염성 있는 얼굴에 예쁘지는 않아도 잘생긴 얼굴형이 드러났다. 바지가 아닌 투피스 정장 차림에 하이힐을 신고 서류가방을 무릎에 다소곳이 놓아두었다. 잘 나가는 비즈니스 여성을 연상케 했다.


'이런~!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전혀 딴판일세...'


그냥 밥이나 먹고 튀자는 생각으로 나왔다가 마음이 30초 만에 확 바뀌었다. 기분이 갑자기 좋아졌다. 생각지도 않았던 반주까지 곁들이면서 유쾌한 저녁식사를 이어갔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 상세히 기억나지 않아도 나는 지금처럼 나의 일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혼자 떠들었을 것이고 그 숙녀는 여전히 잘 들어주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헤어질 때 즈음. 역시 애프터 신청도 먼저 했다. 보통은 그런 일이 있고 나면 남자가 다음 애프터 약속을 청하는 법인데 이 여자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지금까지 모든 데이트 약속은 다 내 소관이었던 것에 비한다면 조금은 당황스럽긴 해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한 느낌이었다. 첫 만남 때보다 더 편해진 탓일까, 거기에 2시간 넘는 대화 속에서 '이 친구 참 괜찮은 구석이 있네'라는 감정이 뒤섞여 들어서일까. 살짝 호감이 생긴 나는 못 이기는 척 그녀의 애프터 신청을 받아들였다. 그 뒤로 가끔씩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며 100m 밖의 그녀가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는 혼자 살겠다고 생각하며 요리도 한식 양식 자격증도 따둔 독신주의를 표방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애인은 아니지만 여자 친구도 있었고 주변에는 나에게 호감을 가진 여인네들이 제법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나에게 부탁을 했다. 자신이 수업이 없는 날은 가끔 출장 갈 때 운전도 해 주고 동무도 해 주겠다는 것이다. 가르치는 일 외에는 사회경험이 없어 경험도 쌓고 바람도 쐬고 드라이브도 할 겸, 겸사겸사 동행하기를 청했다. 특별히 해가 될 일은 없었던 나에게 출장 갈 때 외로운 것보다 낫겠다 싶은 마음에 기꺼이 승낙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것은 그녀의 치밀한 계산에 포함된 계획이었다. 나의 동선을 파악하고 여자 친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던 것이다. 나중에는 오해가 커져 약혼자라는 소문까지 돌아 모든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오기에 이르렀다.


"김 사장님~! 약혼자 있으시다면서요. 그런데 지금까지 저한테 양다리 걸치신 겁니까?"

"오빠! 뭐야~ 그런 사람이었어??"


독신주의자였던 나에게 약혼자라니... 소문이었지만 억울했다. 아마 그녀조차도 이렇게 일이 번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하루 종일 고민을 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녀와 나의 관계를 고민해야 했다. 눈치라도 챈 것일까. 그녀는 예전에 둘이 함께 갔던 미사리 라이브 카페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오늘 저녁 시간 좀 내주세요. 미사리 최백호 라이브 카페에서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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