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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Oct 25. 2019

머슴이 된 서방님(#03)

내 남자 이야기 (21)

(머슴이 된 서방님 03을 이어갑니다)


그녀와 나, 수개월 동안 좀 더 친해지고 많은 대화를 통해 서로 이해할 정도는 되었지만 독신주의를 추구했던 나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오해는 영 못마땅하고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미사리에서 기다리겠다는 그녀와 약속한 시간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이미 훌쩍 지나버렸다.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오랫동안 학생들만 가르쳐온 미련 고집 탱이에 단순한 그녀는 아마 내가 갈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있을 것이다.


"그래.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 "


나는 서울을 빠져나와 외곽도로 달려 미사리로 향했다. 어쩌면 그녀는 기다리다 지쳐 돌아갔을 수도 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의 미련이 계속 차를 몰고 달리게 했다. 약속한 시간보다 두어 시간이 지났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며 그때 그 자리에 앉아 최백호 씨의 노래를 듣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커피를 마셨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뒤죽박죽이었다. 실타래가 엉키고 설켜 도저히 풀어지지 않는 미로 속을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술에 취해 정신이 몽롱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녀가 침묵을 깼다.


"일어나시죠. 시간이 별로 없어서. 가실 곳이 있거든요. 일단 둘 다 차를 가져왔으니 강남역에서 만나죠."


곧바로 일어선 그녀와 나는 강남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 지하상가로 따라갔다. 아무 말 없이 1미터 앞에서 걸으며 가끔 뒤를 돌아보고 나를 확인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가 하자는 대로 뒤를 따라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강남역 지하상가에 위치한 주얼리 매장이었다.


"사장님. 맡긴 것 주세요~"


그리고 커플링인듯한 반지 두 개가 유리 선반 위에 올려졌다. 그녀는 작은 것을 자신의 약지에 끼더니 다른 것을 내게 끼워주었다. '허걱!! 이건 또 뭐지??' 당황스러워하는 내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생각보다 두꺼운 내 손가락 두 번째 마디에서 멈춰버린 반지를 만지작만지작거렸다.


" 어... 눈대중으로 했는데 손가락이 굉장히 두꺼우시네요~^^"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주얼리 가게 사장님이 더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은 손가락 사이즈를 체크하고 재주문했다. 나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혼자서 고민했을 그녀를 보았다. 남녀관계란 선이 확실해야 하는데 나도 그녀에게 일말의 책임감이 느껴졌다. 그저 안쓰럽고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 것 같아 너무도 미안했다.


"오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그런데 반지는 왠... 무슨 뜻이 있는 건가요?"

"저... 김 사장님과 결혼하려고요. 살면서 누군가를 지금처럼 좋아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저 결혼할래요.."

"..!!!."


그 말을 듣는 순간 황당함 그 자체에 아무 말할 수 없었다.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짧은 순간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역시 먼저 프러포즈를 내게 고백해 왔다. 처음 만남도 그녀가 먼저였고 지금의 순간도 그녀가 먼저 내게 묻고 있다. 그녀와 결혼할 거냐고...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한번 해 볼까? '


그녀와의 관계를 고민하면서 하루 종일 골머리를 싸맸던 나는 해결하기도 전에 그녀의 돌직구 같은 행동에 새로운 변환점으로 들어섰다. 뭔가 속은 느낌이다. 그러나 덕분에 내 인생에 켭켭이 쌓였던 인간 벽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가뿐해졌다. 뭔가 구속되는 것 같고 자유롭지 않은 것 같아서 독신주의라는 표방을 내세웠던 건데... 나는 어쩌면 절실한 독신주의자는 아니었나 보다.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그럼 만나 봅시다. 결혼이란 거 해 봅시다! 어떤 건지 함께 살아보면 알겠죠."

"자신은 없어요. 힘들면 얘기해요~"

"대신 싸우지는 맙시다. 내 나이가 늦은 나이니까 싸우면 시간만 아깝고... 만약 정말 아니다 싶으면 내가 스스로 짐 싸서 나갈게요. 그럼 끝난 줄 아세요."




그렇게 우리는 결혼에 골인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꼴값을 떨었다고나 할까... 뭐 그리 잘났다고. 그래도 아내는 아직도 내가 좋단다. 결혼도 못할 노총각을 구제해줬으면서도 그저 좋단다.


늘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아내의 말을 들으며 살아가는 나. 가끔은 영혼 없는 대답으로 "그래, 나도". 그래도 좋다는 아내. 저 콩깍지는 언제 벗겨지려는지...


"아니! 나는 절대 콩깍지 안 벗겨져!! 왜냐구? 떨어질 때쯤 되면 다시 본드로 붙일 거니까!! "


뭐, 이쯤 되면 거의 스토커 수준이다.


참 많고 많은 사연을 담고 살아온 나의 삶 속에 그녀가 들어온 지 벌써 18년이 되어간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배워간다. 시간이 갈수록 함께 주름지는 우리의 모습에 감사하다. 그리고 줄어드는 인생 시계가 아깝기만 하다. 혹 누군가 먼저 길을 떠나 혼자 남을까 봐 두렵기도 하다. 그러니 열심히 사랑하련다. 미련이 남지 않도록.


"여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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