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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Nov 01. 2019

고생 끝에 낙(떨어짐)이 온다.

내 남자 이야기 (22)

일반식당에 식자재를 납품하는 일은 그야말로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수준이었다. 오토바이 배달로 내 인생이 끝날 것 같았다. 얼마 안 되는 물건값도 미수를 까는 업주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느니 차라리 적게 남더라도 물량으로 승부를 보는 도매영업에 주력하기로 했다.


그런 가운데 내 인생의 몇 안 되는 악연을 이야기하려 한다.


나는 도매영업을 위해 사무직 직원처럼 보이는 명함을 새로 만들었다. 왼쪽 가슴에 노란색으로 '천하 유통'이라는 로고를 새긴 회사 점퍼도 맞췄다. 천하 유통은 내가 만든 첫 회사의 이름이다. 점퍼 속에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매고 머리에는 무스를 발라 깔끔하게 넘겼다. 작은 서류가방도 준비해 완벽한 사무직원으로 변신했다.



도매영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도시락 공장, 단체급식 납품공장, 프랜차이즈 물류공장 등 공장지대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납품 상담을 신청했다. 때로는 명함만 돌려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렇게 발품 팔며 고생하긴 했지만 다행히 고양시 삼송리 부근에 위치한 돈가스 도시락 공장과 성동구에 본사를 둔 프랜차이즈 물류창고에 냉동식품을 납품할 수 있었다.


도시락 공장은 일주일에 두세 번, 물류창고는 일주일에 세 번 납품을 해야 했다. 첫 영업성과 치고는 괜찮은 물량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냉동차량이 없었던 때라 오직 오토바이만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먼 거리를 직원들을 보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배달은 순전히 나의 몫이었다.


그러나 뒤로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비록 고단했지만 두 곳 모두 돈가스 패티 맛이 좋다는 평판이 돌면서 주문량도 계속 늘었다. 그렇게 도매와 소매를 병행하며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그러는 1년 동안 어느 누구도  내가 오토바이로 배송하는지 몰랐다. 그만큼 신출귀몰했다는 뜻 아닐까? ㅎㅎ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서면서 고생 끝에 낙(즐거움)이 온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말은 아직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고생 끝에 낙(떨어짐)이 온다...!




어느 날 9시 뉴스를 통해 냉동식품에서 대장균 검출, 햄버거 패티에서 쇳조각 발견, 거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돼지 구제역까지 줄을 이어 사건이 터졌다. 왜 이런 사건들은 비슷한 시기에 한꺼번에 몰리는 건지... 


이후 식중독 우려로 메뉴를 변경하거나 판매 유보를 결정하는 식당이 늘었고 냉동식품을 사용하는 메뉴를 기피하는 고객들로 인해 단체 급식업체들은 줄줄이 도산 위기에 처했다. 갑작스러운 매출 급감은 내가 납품하는 거래처로 이어졌다. 처음에 영업했던 도시락 공장과 물류창고도 마찬가지로 서서히 악성 거래처로 변해갔다.



두 곳에 각각 500~600만 원씩 미수가 깔려 수개월째 수금이 되지 않았다. 영세업자였던 나에게는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수금을 위해 찾아가면 "전화하시고 들어 오세요". "내일모레 다시 오세요" "다음 주에 꼭 입금해 드릴게요"라는 식으로 사람을 힘들게 했다.


"사장님이 안 계셔서 결제가 안돼요.."

'아니! 그러면 오라고 하지나 말던가!!!'


그렇게 수금 문제로 애를 태우다 보면 다른 일은 전혀 할 수 없는 상태로 하루가 지나가버렸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고 두 업체로부터 완불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먼저 도시락 공장으로 출발하면서 확인 전화를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오토바이를 달렸다. 8월의 뜨거운 태양 빛이 내리쬐는 가운데서도 왠지 마음은 뻥 뚫린 듯 시원했다.


'드디어 길고 긴 미수의 끝이 보이는구나~!'



그러나 공장에 도착한 나는 공장 문이 닫혀있는 것을 보고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쿵쿵쿵~!! 문을 열심히 두드려 봐도 인기척이 없었다.


"사장님~ 천하 유통 김**입니다!"

'아놔!! 이 무슨 개 같은 상황인가!'


부동산에 물어보라는 말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가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다. 이미 아침에 건물을 비웠다며 공장 문을 열어 확인까지 시켜주었다. 공장은 텅 비어있었다. 업소용 대형 냉장고, 작업대, 대형 밥솥...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었다. 혹시 맡긴 거라도 있냐고 되물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만나기로 통화했으면 기다려야지.... 그래서 그렇게 서둘렀나? 나쁜 사람이구만... 이 동네 산지 채소값도 안 줘가지고 맨날 싸우고 욕먹고 그러더니만... 쯧쯧.. 쓰레기 구만.. 거.. 젊은 사람이 안됬구먼, 당한 거야."


참,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는 말을 실감했다. 오토바이까지 가는 길이 왜 그리 멀게 느껴지는지. 내 앞으로 돌아오는 공장 결제며 공과금 등 나가야 할 돈은 지천인데 한두 푼도 아니고 막막하기만 했다.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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