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그라미 Nov 02. 2019

고생 끝에 낙(떨어짐)이 온다.

내 남자 이야기 (23)

https://brunch.co.kr/@goldstar10041/41


나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나머지 미수금이라도 잘 받는 것이 중요했다. 급한 마음에 이틀 뒤로 약속된 체인 물류창고 본사로 속력을 내서 달렸다. 혹시 모를 불상사... 그마저도 이곳과 상황이 비슷하다면 회사문을 닫아야 한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연락할 겨를도 없이 도착하자마자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현관문을 차다시피 거칠게 열어젖혔다. 웅성웅성...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부장님 계세요? 결제 때문에 온 김**입니다! 식자재 담당인데 이틀 뒤에 약속이지만 좀 급해서 지금 왔습니다!"


그 가운데 안면이 있는 박 대리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사장님~ 잠시만요. 저랑 차 한잔 하시죠."


연신 담배를 피워대는 박 대리.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나는 곤욕스러운 시간이기도 하다.


"제가 이런 말씀드리기는 뭐하지만 비슷한 또래라서 말씀드리는 건데 이따 부장님과 이야기 나누시거든 무조건 주는 대로 받아서 챙기세요. 반이라도 받아 정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사실, 저희 회사가 상황이 안 좋아서 오늘내일합니다. 아마 오늘 안 오셨으면 저도 못 만났을 거예요. 오늘 퇴사하거든요. 지금 이곳 빚이 산더미라서 난리입니다."


결국 상황을 정리하고 합의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귀띔해 준 박 대리가 고마워 봉투에 10만 원을 넣어주면서 소주값이나 하라고 했다. 불과 일주일 전에 납품한 물품을 생각하니 아깝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물건을 주문한 대표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믿을 놈 하나 없네. 여기도 당한 거야...'


씁쓸한 소주 한 잔이 그리운 날이었다. 혼자 단골 포장마차에 앉아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용이 사건 이후로 상처를 가슴에 안고 혼술을 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젊은 날의 상처는 아물고 있었다.



그리고 수년 뒤 역삼역에 있는 제일은행에서 우연히 한 남자를 마주쳤다. 자꾸만 쳐다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워 얼굴을 같이 쳐다보았는데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이었다. 분명 어디서 본 듯한 얼굴... 혹시 아는 사람인가 싶어 말을 걸었지만 그 남자는 동행인과 급하게 나가버렸다.


웬만하면 한 번 본 얼굴을 안잊버리는 성격상 낮에 보았던 그 남자의 얼굴이 잊히지 않고 기억을 헤집고 다녔다.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하루 종일 기억나지 않는 머리를 싸매고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비디오를 밤늦게까지 몰아보다 겨우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는 장면이 펼쳐지며 그 남자의 얼굴이 정확하게 떠올랐다. 바로 그 남자.... 내 돈을 떼먹고 도망간 그 세키였다.


"아이! 이 도둑놈!! 내 돈 내놔!!"


나는 악연의 끈이 많았다. 그러나 그 악연을 계속 마음속에 가지고 살아갔다면 아마 이미 저세상 사람이 아니었을까? 고생 끝에 즐거움이 분명히 온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고생이 양이 다하기까지는 인생 고비가 무수히도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한다는 것을 배운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생 끝에 낙(떨어짐)이 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