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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Oct 21. 2019

젊은 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내 남자 이야기 (17)

( 믿었던 직원의 배신으로 상처가 깊었을 텐데 그래도 용기를 내서 다시 도전하는 모습은 젊음이라는 아름다운 날의 추억입니다)

나는 그렇게 용이와 연주를 보냈다. 아직 사회를 잘 몰랐고 사람을 잘 몰랐던 나에게는 많은 교훈을 남긴 시간이었다. 그 후로 사람을 잘 믿지 못해 모든 일은 내 손을 거쳐야 직성이 풀리는 못된 습관이 형성된 것도 바로 그 탓이다.


용이와 연주 관계뿐만 아니라 거래처와의 관계도 제법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다시 혼자가 된 나는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도매 영업뿐만 아니라 단체급식 업체나 공장 식당 등을 찾아다니며 영업을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거절. 이미 오랫동안 물건을 납품받는 탄탄한 거래처가 있는 상황에서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다. 특히 나 같은 영세업자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던 중 군대 가기 전, 알바를 하면서 친분을 쌓게 된 요리학원 선생님의 소개로 삼진제약 공장에서 일하는 영양사를 소개받았다. '두통 치통 생리통엔 게**~'이라는 CF 방송으로 유명해진 삼진제약은 홍대 부근에 본사와 물류창고가 있었다. 그래서 상담만 잘 된다면 물건을 납품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그러나 당시 정부 시책으로 화성 발안지역에 제약공단이 조성되면서 제조공장들의 이전이 불가피했다. 모든 제약회사의 제조공장들이 이전하는 상황에서 삼진제약은 공장 식당 운영에 새로운 식자재 업체를 물색하던 차였다.


"왕** 요리학원 오선생님이 굉장히 성실하시다고 칭찬하시던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런데 납품하실 곳이 새로 공단이 조성된 곳이라 외지고 너무 멀어서요. 괜찮으시겠어요?"

"네. 걱정 마십시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배송해드릴게요."


망설임 없이 상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마음 한편으로 밀려드는 걱정을 떨쳐버리려 애를 썼다. '그래, 나는 잘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에서 화성 발안까지는 굉장히 먼 거리다. 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2시간 30분 이상을 오토바이로 달려야 하는 거리. 새벽시간을 기준으로 한 것을 감안한다면 교통체증이 있는 낮시간에는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그래도 나는 자신이 있었다. 꿈이 있었다. 꿈을 꾸었다.

당시 제약공단 내에 입주한 공장이 50곳이 넘었고 이후로는 거의 모든 제약회사들이 입주할 계획이었다. 삼진제약 하나에 납품만 잘하면 소문을 타고 이곳 공단 내의 모든 식당에 물건을 납품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섰다. 성실과 오차 없는 배달 그리고 좋은 물건. 이 삼박자를 균형 있게 인식시키기만 한다면 승산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무리가 되고 위험이 있더라도 꼭 가야만 하는 거래처였다.


처음에는 매주, 그리고 2주에 한 번씩 오토바이 새벽 배송이 시작됐다. 냉동 돈가스 패티 2박스, 생선가스 2박스 무게가 약 30kg이나 되는 물품을 싣고 새벽을 달렸다. 공장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배송이 돼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아침 6시 전에는 도착해야 한다. 


새벽 3시 30분, 물건을 오토바이 뒷자리에 싣는다. 넥타이까지 맨 정장 차림 위에 두꺼운 점퍼를 입고 구두는 준비된 가방에 넣는다. 마지막으로 우비 옷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덧입고 두꺼운 신발, 장갑, 마스크를 하고 헬맷을 쓰고 출발... 특히 겨울 허허벌판의 화성 시골길을 오토바이에 의지한 채 달리는 것은 그야말로 혹독한 추위를 그대로 온몸으로 받아야 하는 고통스러움이 따른다.

국도로 이어지는 길, 역촌동에서 서부간선도로를 따라 안양을 지나 수원을 거쳐 화성 발안으로 향하는 길을 달렸다. 그리고 공단이 보이는 허허벌판까지 쉬지 않고 달려 멀찌감치 정문이 보이는 곳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그리고 새벽 내내 바람을 맞으며 달려 어수선한 모습을 손질하며 넥타이를 맨 영웝사원으로 변신했다. 무스를 손으로 비벼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구두도 꺼내 신었다. 그리고 무거운 박스를 들고뛰다시피 정문으로 갔다. 정문을 통과하기 위해 영업사원 전용 패스를 목에 걸고 다시 500미터를 더 들어가야 한다.


"여보쇼~ 젊은 양반! 아니, 차는 어디에 두고 그 무거운 걸 들고 와요?"

"아~ 네... 그렇게 됐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혹여 납품하는 본사에 내 모습이 보고라도 될까 걱정되는 마음에 경비 아저씨에게 항상 담배 두 갑을 손에 쥐어 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오토바이를 멀리 세우고 무겁게 걸어오는 것을 보고 젊은 사람이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아 관리실에 보고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그렇게 한 번 물품을 납품하고 나면 남는 것은 3만 원. 기름값과 시간에 비한다면 남는 것이 없다.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고 했던가... 이 공단의 절반만이라도 거래를 하게 된다면 이깟 고생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어 겨울이 되면서 몸으로 받는 찬바람은 살을 에이다 못해 뼈를 얼어붙게 할 정도로 힘겨웠다. 아무리 두꺼운 옷을 입고 두꺼운 장갑을 끼고 그 위에 바람막이를 걸쳐도 새벽 오토바이 배달은 정말 피하고 싶은 시간이었다. 화성에 다다를수록 허허벌판에서 불어닥치는 찬바람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파고들어 온 몸을 난도질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달려 공단에 들어서면 그대로 쓰러졌다. 얼어붙은 몸을 잠시 그대로 두었다. 뻐그덕 거리며 뼈가 윤활유를 맞아 일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1년을 보냈다. 승용차를 구입해 납품을 하게 됐지만 워낙 남는 것이 없었던 터라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서는 궂은 날씨를 제외하고는 거의 오토바이로 배달했다.


생각보다 폐쇄적이다시피한 제약회사의 특성 때문에 기존 업체들과 재계약을 맺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직접 물품을 구입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어 주위 제약회사를 소개받는 것이 한계가 있었다. 또한 직접 영업을 하기란 더더욱 어려웠다. 그리고 나는 3년 동안 삼진제약과의 마무리하게 됐다. 그도 담당 영양사가 퇴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납품업체가 다른 곳으로 바뀐 것이다. 처음 공단 전체에 납품하겠다는 꿈은 그렇게 사라졌다. 희망으로 가득했던 의지는 그냥 열정만 가득했던 헛물이었다.

홍대 본사에 들러 담당자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가는 길. 잠시 홍대 캠퍼스 잔디밭에 앉았다. 활짝 웃으며 대학거리를 활보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그들의 젊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 또한 젊었다. 이제 20대 후반... 그런데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바쁘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을까? 새벽을 달리며 교통사고를 세 번 당하면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시간들이 스윽~ 순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남은 거라고는 그저 크고 작은 상처들 뿐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후회하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그렇게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했던 까닭에 희생되었다는 자책감이 아니라 젊은 날의 한 조각 멋드러진 그림을 그렸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젊은 날, 그렇게 내 삶의 또 한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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