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그라미 Nov 07. 2019

바람난 남자,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

내 남자 이야기(27)

(삶은 정해진 형식이 없는 드라마입니다. 그 드라마 속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펼치는 주인공들만 있을 뿐이죠. 그리고 각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가치관은 삶의 기준점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사업이 부도를 맞고 갈 곳 없었던 나는 친한 선배와 사무실을 같이 쓰게 되었다. 양재동에 위치한 사무실은 북적대는 낮시간을 제외하면 저녁에는 잠도 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6개월 동안 선배와 함께 있으면서 못 볼 꼴을 다 보게 되었고 가장 더러운 기분으로 헤어지게 됐다.


선배는 애초부터 자신이 하고 있는 암웨이 사업에 나를 끌어 들일 생각으로 사무실을 흔쾌히 내주었던 것이고 나는 잠 잘 곳이 필요했기에 서로의 계산에 의한 선택이었다.


선배는 가끔 술도 사주고 텅 빈 냉장고에 맥주도 채워 넣었다. 술 마신 다음날에는 해장국으로 속을 풀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선배의 호의 속에서 지내는 한두 달 동안 사무실에 쌓아놓은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에 이만한 것이 없었다. 선배는 네트워크 마케팅 관련 서적을 폼으로 사 두었지만 나는 덕분에 유통 관련 상식을 배우는 계기가 됐고 이후 무역이나 국내 영업을 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선배와 가까워질수록 보지 말았어야 할 면면을 보게 되어 실망이 커져만 갔다. 역시 인간관계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한 것인가....  평소 입버릇처럼 지껄여대던 말이 현실이 되어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게 되면서부터 선배에 대한 믿음은 금 갈 데 없이 금이 가 버렸다.


"김 사장. 남자는 말이야 속궁합이 좋은 여자를 만나야 되거덩. 근데 우리 마누라는 영 안 맞는 것 같아... 내 짝 나지 말고 여자 잘 골라.. 그리고 울 마누라한테 전화 오면 알아서 잘 둘러대는 거 잊지 말고... 술 한잔 찐하게 살게. 나는 이해가 안 가는데 김 사장하고 같이 있다고 하면 울 마누라는 안심하거든..."


토끼 같은 마누라와 아이들까지 있는 가장이 하는 소리다. 자신은 결혼 따로 연애 따로를 주장하며 가장으로서의 일말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 넘기려고 하는 것 같아 내심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술집 마담과 붙어먹은 이후로 선배는 더욱 망나니가 되어 밖으로 돌았다.


술을 마시는 동안에도 도를 넘는 스킨십이 더럽고 매스꺼워 까칠하게 굴었다.

"이봐요! 거 쫌 심하네. 그 형님 결혼했거든요! 좀 떨어져 앉던가! 아무리 장사 때문이라고 해도 예의는 있어야지!"

"야! 너 왜 그래? 한 건물에 살면서 까칠하기는... 그냥 좀 넘어가자. 술이나 한 잔 받아..."


선배와 동갑내기였던 마담은 암웨이 사업을 같이 하기로 하면서 사무실에 왕래하는 것은 물론이고 둘이 수시로 지방 출장을 다녔다. 그때마다 선배는 형수에게 전화를 걸어 나도 함께 출장 간다고 거짓말을 시켰다.


"김 사장님이 함께 간다니.. 믿을 수밖에요~ 고마워요."


마음은 그리 편치 않았지만 선배의 가정이 깨지는 것보다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언제나 선배 편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그런 꼬리가 길면 늘 밟힌다.




그 해 크리스마스 전 날, 아빠가 없이 외롭게 보내야 했던 형수와 아이들과는 반대로 마담과 스키장에 놀러 간 선배는 누군가의 시선에 딱~ 걸리고 말았다. 모든 것이 들통났고 집안은 풍비박산 직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결국 나를 핑계 삼아 변명을 해 대고 있었던 선배는 나를 집으로 불러들여 아내에게 다시 거짓말을 시켰다.


"김 사장!! 좀 도와줘! 나 얼굴에 기스나고 장난 아니야... 너 데리고 오래.. 확인한다고. 제발..."


잔뜩 화가 올라 도저히 용서할 것 같지 않은 얼굴로 남편을 노려보고 있던 형수를 보니 내 마음은 솔직하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이번만 잘 넘어가면 선배도 조금은 달라질 거라는 일말의 양심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 모든 현장에 내가 함께 동행했었다고 형수를 안심시키고 그렇게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역시 개버릇 남 못준다는 속담이 맞았다.


"야, 난 그 여자가 좋다. 속궁합이 딱이야! 우리 못 헤어질 것 같은데 몰래 만나면 안 될까?"

"우리 이제 더 이상 만나지 맙시다!! 형수한테 거짓말하는 것도 신물 나고 처음부터 선배는 나도 속인 거고... 나도 속았고... 제발 이제는 속궁합 타령하지 말고 진짜 가족으로 돌아가세요!"


비위가 상할 대로 상한 나는 다시는 선배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의 연을 정말 끊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선배 친형을 만난 후였다. 당시 해외 근무에서 돌아와 보니 동생 가정이 위기를 맞고 자신이 내주었던 오피스 사무실은 간 데 없고 오히려 빚만 지고 있는 동생을 추긍해 보니 그 모든 것이 나로 인해 생긴 일이라고 핑계를 댔던 것이다. 사업도 방해하고 사무실에서 잠자느라 고객관리나 교육도 안되고 비용이 더 많이 들었다는 핑계에 나를 잘 아는 큰 형님은 직접 만나 사실여부를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큰 형님은 모든 자초지종을 다 듣고 한 숨만 내쉬며 마지막 헤어짐의 인사말을 건넸다.


" 내가 동생 교육을 잘못시켰다. 너한테 정말 미안하다. 동생은 내가 알아서 따끔하게 교육시키마. 그러나 팔은 어쩔 수 없이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구나. 어찌 됐든 내 동생이고 앞으로 널 계속 만나게 된다면 지난 일들이 자꾸 나를 괴롭힐 것 같다. 그러니 우리 여기서 마무리하자."



팔은 안으로 굽는다.... 결국 못난 동생이지만 동생을 위해 어느 한 놈은 거짓말쟁이로 남게 되었다. 나는 이해는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은 찢어질 듯 고통이 느껴졌다. 이렇게 동생을 아끼는 형님이 있다는 것이 비록 배울 것 하나 없는 선배지만 마냥 부럽기만 했다. 왜... 나에게는 그런 형이 없을까... 왜 나에게는 그런 가족이 없을까...


가족은 가장 밑바닥에 곤두박질칠 때도 넓게 팔을 벌려 포근히 안아주는 그런 힘이 있나 보다. 비록 비뚤어지고 못난 삶을 살아가도 가족의 품이 따뜻한 것은 그 삶을 이해해 주고 다독여 줄 수 있는 사랑 때문이다. 큰 형님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자리에서  서서히 밀려오는 차가운 외로움을 온몸으로 받아야 했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외로워야 할까.... 생각하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할아버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