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야, 제발 떠나지마라!

갱년기부부, 그들의 사는 이야기 (07)

by 동그라미

2020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

드디어 에어컨을 설치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온지 6년째에 접어들고 있지만 산밑에 자리잡은 주택이라 그럭저럭 여름을 버텨왔다. 파주 황룡산 밑자락에 위치한 우리집은 여름이 늦게 오고 겨울이 일찍 찾아오는 곳이라 한여름 무더위 며칠만 버티면 굳이 에어컨이 필요없는 편이다. 파릇한 잔디가 지면의 열기를 식혀줘서 문을 활짝 열고 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거실을 관통한다. 한강에서 텐트를 치고 치맥을 먹으며 열대야를 식히는 사람들의 소식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먼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사실은 이러하다.


가장 무더웠던 2018년 여름. 남서향으로 난 창을 통해 길게 들어오는 햇살은 여름이면 지옥불을 연상하게 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주르륵 런닝 속으로 흘러든다.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울을 닦고 숨을 할딱 거리며 선풍기 앞으로 다가가보지만 선풍기 바람인지 열풍인지 분간이 안될 지경이었다. 한 밤중에도 몇 번을 잠에서 깨 샤워꼭지를 틀고 물을 끼얹지만 하루종일 지열로 데워진 수도에서는 미지근한 물이 나왔다. 미칠지경이었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다. 그래서 피서를 떠나는가보다.


그렇게 이 집에서 5년을 살았다. 에어컨을 설치하자고 떼를 써가면서. 가만히 서 있는 에어컨이 썩어가는 게 분명했다. 정말 에어컨 실외기에 녹이 슬기 시작했다. 통쾌했다.

그래 이놈의 에어컨! 못 쓸바에야 썩어 버려라!


집에 구멍 뚫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남편은 액자를 걸기 위해 못 박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시계는 탁상용 아니면 안되고 액자는 책장 위나 게단 위 벽에 기대도록 배치한다. 정말 어쩌다 못을 박기라도 하면 온갖 도구가 총동원돼 가로, 세로, 높이를 정화하게 재고 몇 번을 확인한 후에야 못을 박는다. 그러니 에어컨 실외기 설치 때문에 벽에 구멍을 뚫는다는 것은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러. 나.

2020년 여름이 시작되기 전에 드디어 에어컨을 설치했다. 4월부터 성수기를 시작하는 에어컨 설치기사와의 예약 조율은 몇 달을 기다려야 할 뿐만 아니라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새 것으로 교체하자는 결론을 내렸고 약속된 날짜에 신속 정확하게 가장 최신형의 에어컨이 집으로 들어왔다. 거실과 안방 벽에 구멍을 뚫고 설치된 에어컨, 드디어 풀가동!!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한 여름을 집안에서 쾌적하게 보낼 수 있게 됐다는 기쁨에 환호성을 질렀다. 어려운(?) 결정을 내린 남편에게도 만면에 미소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이제 뜨거운 여름만 오면된다.

.....

제발 뜨거운 여름이 와야 한다.

......

아니. 며칠만이라도 뜨거워져라.

......

그러나 2020년의 여름은 멈출 줄 모르는 기나긴 장마 속에서 햇살을 볼 수 있는 날이 며칠 되지 않았다. 역대 가장 긴 장마를 기록한데다, 2020년 한 해 동안 발생한 태풍만 23개. 정말 무더워야 할 7월과 8월을 구멍 뚫린 하늘에서 퍼붓는 장맛비와 함께 보내야 했다.


어째 이런 일이!. 에어컨 틀고 시원하게 여름밤을 보내고 싶었는데.... 오히려 이불을 덮고 자야할 판이라니. 너무해. 너무해.



매거진의 이전글엄마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