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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호 Sep 28. 2024

'일이 없어서...' 시체 염습을 시작한 첼리스트

오마이뉴스 게재, <굿바이> 영화평

[김성호의 씨네만세 292] <굿바이>


▲ 영화 <굿바이> 포스터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선 자리를 탓한 시절이 있었다. 돈이 없어서, 집안이 별로여서, 내세울 만한 게 많지 않아서, 이름 있는 회사에 다니지 못해서, 온갖 것을 끌어와 내가 저지른 잘못을 뒤집어씌웠다.


세상은 마음처럼 풀리지 않았다. 기대한 자리는 늘 남의 차지가 됐고, 공모전엔 번번이 미끄러졌다. 취업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봉급은 보잘 것 없었고, 주어지는 일도 별 볼 일 없었다. 하루하루 잘 나가는 친구들에게 뒤처지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늙어버리면 어떡하지. 조급함이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책임을 미루고만 싶었다. 보잘 것 없던 시기를 보잘 것 없이 지내다보니 남의 시선만 신경 썼다. 제 삶을 살면서도 만족할 줄 몰랐다.


선 자리보다 자세가 중요하단 걸 깨닫기까지는 많은 경험이 필요했다. 익숙한 내 나라와 가족과 애인을 떠나서야 정말 지켜야 할 것과 쓸모없이 집착하고 있었던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중요한 것을 지키다보니 다른 것엔 신경 쓸 여유도 필요도 없었다.


다시 돌아와 같은 자리에 서서 다른 마음으로 일하는 건 놀라운 경험이었다. 내 선 자리와 내 일과 내가 지나온 것들을 긍정할 수 있었다. 자긍심이 무엇인지 그때서야 알았다.

   

▲ 영화 <굿바이> 스틸컷.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업에 대하여, 자긍심에 대하여


<굿바이>는 자긍심에 대한 영화다. 제 선 자리를 긍정하며, 긍지를 갖고 묵묵히 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도쿄 어느 악단 첼리스트 다이고(모토키 마사히로 분)는 하루아침에 일을 잃는다. 큰 빚까지 내 첼로까지 샀건만 악단이 해체된 것이다. 제 경력과 실력으론 마땅히 갈 곳도 없단 걸 다이고가 가장 잘 안다.


다이고는 아내(히로스에 료코 분)를 설득해 고향으로 간다. 어릴 적 종업원과 눈이 맞아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어머니가 운영해온 가게가 둘의 터전이 된다.


언제까지 백수로 살 수는 없는 법, 다이고는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NK에이전트란 업체를 찾는다. 사장 이쿠에이(야마자키 츠토무 분)는 다짜고짜 합격이라며 한 달에 50만엔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NK에이전트는 사망자의 몸을 닦고 옷을 입혀 관에 넣는 일을 한다. 납관을 줄여 NK라 부른다는데, 우리 표현으로 하자면 염습을 전문으로 하는 외주업체다. 첼리스트가 아무리 일이 없다고 염습이라니, 뭔가 아니다 싶지만 분위기에 압도돼 일단 출근하기로 한다.

   

▲ 영화 <굿바이> 스틸컷.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긍지를 갖고 제가 선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


영화는 다이고가 이쿠에이와 함께 일하며 진정한 염장이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는다. 이쿠에이는 어느 한 죽음도 소홀히 넘기지 않는다. 다이고가 이쿠에이의 염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느낀 그대로 '차갑게 식은 사람을 치장해 영원한 아름다움을 주는 행위이고, 냉정하면서도 정확하고 동시에 따스한 애정이 넘치는 일'이다.


하나하나의 죽음에 예를 갖춰 배웅하는 이쿠에이에게선 장인의 멋과 혼까지 느껴지는 듯하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이쿠에이의 염습을 지켜본 다이고가 변하지 않을 리 만무하다. 제 하는 일에 긍지를 갖고 선을 다하는 인간은 지켜보는 이조차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이쿠에이와 다이고 뿐 아니다. 크고 작은 배역을 맡은 이들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끄는 목욕탕 아주머니(요시유키 카즈코 분)와 화장장 아저씨(사사노 타카시 분)도 같은 사람들이다. 목욕탕 관두고 건물을 팔자는 아들에게 "목욕탕 없어지면 단골손님들은 어쩌느냐"고 들은 채도 안 하는 아주머니는 제 업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이가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해도 제 자리를 지키는 화장장 아저씨는 또 어떤가. 이들은 제 일에 긍지를 갖고 자리를 지킴으로써 세상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이보다 더 멋진 일이 세상엔 얼마나 있을까. 나는 딱히 알지 못한다.

   

▲ 영화 <굿바이> 스틸컷.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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