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게재, <뱅가드> 영화평
40년을 한 길만 걸어온 장인이 있다. 대충 비슷하게 보이게 하는 걸 그는 용납하지 않았다. 재봉틀이 있어도 한 땀 한 땀 손으로 꿰매길 고집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부분도 공들여 색칠하는 장인처럼 늘 최선을 다했다.
세상이 그의 가치를 알아보는 데는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그는 금세 유명해졌고 그 유명세에 충실히 보답했다.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방식을 놓지 않았다. 여전히 한 땀 한 땀 공들여 나아갔다. 사람들은 그의 이런 태도를 우러르며 성공한 고집쟁이라 일컬었다.
장인도 나이를 먹는다. 어느 뛰어난 요리사도 100년을 활약하진 못하는 법, 그는 후계자를 물색해 제 자리에 두었다.
수려한 용모의 후계자는 장인이 고집한 원칙을 하나하나 바꾼다.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세상은 더 세련되고 화려한 걸 좋아하니까. 어느덧 장인의 작품엔 장인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장인을 사랑했던 이들조차 장인의 작품에 비웃음을 던진다.
성룡의 변절, 영웅의 타락
다름 아닌 성룡의 이야기다. 화려한 카메라워크와 규모 있는 액션신이 넘쳐나던 시대, 우직한 액션 하나로 가장 비판적인 관객조차 매료시켰던 성룡이 눈뜨고 보기 힘든 영화로 돌아왔다.
성룡 영화에서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CG와 가짜액션이 영화 내내 넘실된다. 제 길 하나만 걷던 장인이 잘 나가는 옆집 비결을 훔쳐다 비슷하게 찍어내는 광경은 눈뜨고 보기 힘들 만큼 참담하다. 변신이 아니라 변절이고, 타협이 아닌 타락이다.
<뱅가드>는 액션영화다. 탕환팅(성룡 분)이 이끄는 경호업체 뱅가드가 범죄조직의 위협으로부터 VIP고객을 지키는 게 주요 얼개다. 런던과 아프리카의 어느 사파리, 두바이까지를 오가며 총격전과 자동차액션, 수상액션, 하다못해 최첨단 전투기와 항공모함 액션까지 이어진다.
"우리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다 보여주고 와"라는 중국 공산당 수장의 지령이라도 받은 양 할 수 있는 모든 걸 아낌없이 쏟아 붓는다.
문제는 질에 있다. 어느 하나 참신하거나 새롭지 않고 활용한 기술 역시 죄다 어디서 본 것들뿐이다. 규모는 잔뜩 키웠지만 짜임새가 없어 감정을 움직이지 못한다.
캐스팅을 맡았다는 성룡의 안목은 실망스럽다. 주연으로 양양, 서약함, 무치미야, 애륜 같은 청춘스타를 두루 기용했는데 하나같이 겉도는 연기만 할 뿐이다. 양양과 서약함, 무치미야의 빼어난 용모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급박한 상황에서도 예쁘게 보이려는데 급급한 태도는 액션영화에서 치명적인 허점을 노출한다.
실종된 스타일, 성룡영화 아닌 성룡영화
액션실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급하게 수련한 기색이 역력해 과거 성룡영화의 장점을 비슷하게 흉내 내기도 벅차다. 카메라를 멈춰두고 때리고 맞고 기발하게 도구를 활용했던 성룡표 액션은 완전히 실종됐다. 배우에 자신이 없다보니 카메라를 흔들고 기술을 때려 박는 방식 밖에는 승부할 길이 마땅찮다.
과거 홍금보, 원표와 골든 트리오를 이뤘던 성룡이 다분히 아이돌스러운 배우들을 카메라 앞에 세운 선택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배우에 자신이 없다보니 영화는 기술과 규모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초반 런던에서 벌이는 자동차 추격신부터 아프리카에서 맹수들이 등장하는 신, 폭포 앞에서 수상액션을 벌이는 신, 두바이에서 벌어진 전함들의 전투신까지 죄다 CG를 잔뜩 활용했다.
몇 번이고 같은 액션을 반복해 최고의 장면을 잡아냈던 성룡의 고집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결정적인 액션을 모두 CG로 빚어내다보니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가 헷갈릴 지경이다. 영화가 비록 가짜의 예술이라 해도 수십 수백 번 같은 액션과 연기를 반복해 진짜를 빚어냈던 성룡의 멋은 완전히 실종되고 말았다.
자신감인 척 하지만 실상은 열등감
이번 영화가 비단 성룡만의 문제가 아니란 점은 여러 군데서 드러난다. 특히 할리우드에 대한 열등감이 곳곳에서 배어나온다는 게 그렇다.
영화 속에서 VIP를 노리는 악당조직 이름은 다름 아닌 '어벤져스'다. 경호원 추카이쉬안(애륜 분)은 극중 아들에게 '캡틴 차이나'라고 불린다. 뱅가드 멤버들이 붙잡힌 동료를 구하기 위해 활주로로 나아가는 장면은 다분히 <어벤져스> 시리즈나 마이클 베이 류의 영화를 연상케 한다. 로봇장비를 착용하고 하늘을 나는 요원은 '콘도르'라고 불린다. 이쯤 되면 패러디가 아닌가 싶지만 영화는 놀랍게도 진지하다. 저 혼자서 진지하다.
그러면서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단점은 그대로 답습한다. 우정과 사랑, 가족과 반전까지, 영화 속 모든 전개가 다른 영화에서 선례를 찾을 수 있는 것들뿐이다.
구석구석 CG를 바르고, 아메리카 대신 차이나로, 팔콘 대신 콘도르로 이름만 바꿔놓은 선택은 자신감을 가장한 열등감의 반영이다. 영화 속 주인공이 악당에게 씹어뱉는 "우리말은 배웠을지 몰라도 우리 문화는 못 배웠군"이란 말은 영화 제작진에 그대로 돌려줘야 마땅하다. 할리우드 기술을 따라했을지 몰라도 내실은 어림없다고.
한때 아시아의 영화맹주로 번성한 홍콩을 사회적, 문화적으로 짓밟은 중국은 영화마저 이렇게 바꾸어버렸다. 고집스레 수십 년 간 제 스타일을 갈고 닦아 홍콩과 아시아를 넘어 할리우드를 흥분케 했던 성룡과 감독 당계례가 이토록 졸렬한 작품을 찍어낸 것은 예술이 자본만으로 이룩되는 게 아니라는 교훈을 남긴다.
25년 전 <홍번구>로 전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할리우드를 떠들썩하게 한 당계례와 성룡 콤비가 이제는 할리우드 뒤꽁무니만 쫓는 영화인이 되었다는 건 한때 그들을 애정한 팬으로서 감추기 어려운 감정을 일으킨다.
홍콩의 영광은 어디에? 자본만으론 얻을 수 없는 것
성룡은 지난 40여 년 간 홍콩과 미국에서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업적을 쌓아올렸다. 카메라를 우직하게 멈춰두고 스스로 많이 움직였다. 때리는 것보다 많이 맞았고 누구보다 많이 뛰고 뛰어내렸다. 동시대 할리우드를 주름잡던 액션스타 아놀드 슈워제네거, 실베스타 스텔론, 브루스 윌리스, 장 끌로드 반담, 스티븐 시걸, 커트 러셀 모두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버스터 키튼의 진정한 후계자가 할리우드가 아닌 홍콩에서 왔다고 했다. 마블시리즈 가운데서도 명작으로 꼽히는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홍콩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맨손 액션을 접목해 기록할 만한 성취를 거뒀다.
성공한 고집이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는 오랫동안 지켜왔던 그 고집을 스스로 저버렸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나는 처음부터 한 결 같이 수십 시간 육수를 고아내던 가게에서 대기업에서 나온 분말스톡을 쓰기 시작했단 소식을 들은 것처럼 배신감을 느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영화를 무너진 홍콩영화예술과 그를 용인한 성룡의 변절이라 부르기로 했다. 성룡이 홍콩보안법에 찬동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으나 직접 마주하니 참담한 마음을 가릴 수 없다.
잘 가시오, 대형.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