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씨네만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호 Nov 01. 2024

CG 대신 진짜 불을 질러서... 러시아의 놀라운 선택

오마이뉴스 게재, <브레이브 언더 파이어> 영화평

[김성호의 씨네만세 312] <브레이브 언더 파이어>


타오르는 불길 속 헬리콥터 한 대가 안간힘을 쓰고 있다. 불타는 숲에 내려앉은 헬기는 사방이 불길이다. 빠져나갈 곳은 하늘 뿐, 조종사는 온 힘을 다해 조종간을 잡아당긴다.


오래된 기체는 말을 듣지 않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기내엔 사람들이 가득하다. 조종석에 두 사람, 뒤쪽에도 아이들 수십 명이 타 있다. 낡은 헬기로선 이미 정원을 초과한 상태다.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마을을 덮친 화마를 피해 겨우 빠져나온 터다. 아이들을 가득 채운 차를 케이블로 매달고 헬기는 한참을 날아왔다. 그러다 케이블 한 가닥이 끊어졌고 헬기는 공터에 비상착륙한 참이다.


자동차 운전석에 타 있던 소방관은 황급히 아이들을 헬기 안으로 실어 날랐다. 모두가 헬기로 옮겨 탔을 즈음엔 불길이 십여 미터 앞까지 다가왔다. 이대로라면 헬기가 불타버리는 것도 시간문제다. 조종사는 팔이 빠져라 조종간을 잡아당긴다.

 

▲브레이브 언더 파이어포스터BoXoo 엔터테인먼트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하는 사람들


낡은 헬기는 좀처럼 솟아오르지 못한다. 조종사는 뒤를 향해 "무거운 건 죄다 버려"하고 소리친다. 사다리며 소화기며 삽과 각종 집기들을 모두 내다버린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기체에 달린 의자까지 뜯어 밖으로 집어던진다. 헬기는 간신히 지면 위로 발을 뗐지만 그 이상 날아오르진 못한다.


"얘들아, 신발 다 벗어."


소방관 아저씨가 소리친다. 그는 제가 신은 신발부터 벗어던진다. 아이들이 신은 조막만한 신발들이 모여 헬기 바깥으로 떨어진다. 신발 다음은 외투다. 불타는 러시아 숲 한 가운데서 아이들이 외투를 벗어던진다.


헬기는 마침내 솟아오르고, 아이들은 불길을 벗어나 안전한 곳에 내린다. 카메라는 활주로를 걸어가는 아이들의 발을 잡는다. 검은 아스팔트 위로 새하얗게 빛나는 맨발이다. 그 맨발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는 증표다.

 

▲브레이브 언더 파이어스틸컷BoXoo 엔터테인먼트

 

누군가를 위해 나를 내던지는 일


<브레이브 언더 파이어>는 다른 인간을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영웅들의 이야기다. 시베리아 드넓은 벌판에서 불길을 잡으려 분투하는 산림소방관들이 주인공이다.


러시아 산림소방관의 명성은 대단하다. 2019년 강원도에 산불이 났을 당시 한국에서도 러시아에서 전문적인 진화기술을 배워야한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가만히 있는데 명성이 났을 리 없다. 수많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드넓은 벌판에서 수시로 산불이 발생한다. 건조한 기후가 길고 탈 것은 널렸으니 산불이 나기 딱 좋은 환경이다. 그 화마와 오랜 기간 싸워왔으니 러시아 소방관들의 기술과 노하우가 대단할 수밖에 없다.


안드레이(콘스탄틴 카벤스키 분)는 러시아 소방청의 베테랑 소방관이다. 6명으로 이뤄진 산불진압팀 팀장으로, 그의 팀은 청에서도 제일로 꼽힌다. 그런 그의 팀에 결원이 생겼다. 새로 배치된 대원이 사망한 것이다. 진압 도중 팀원들이 불길에 고립됐고 겁을 먹은 신입은 혼자 도망치다 변을 당했다.


영화는 안드레이의 팀에 제멋대로인 젊은 소방관이 배치된 뒤 겪는 이야기를 그린다. 대규모 산불진압 작전에 투입된 안드레이의 팀이 처하게 되는 난처한 상황들과 그 상황에 대처하는 과정이 극적으로 연출됐다.

 

▲브레이브 언더 파이어스틸컷BoXoo 엔터테인먼트

    

더 나은 사회가 더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믿음


CG 대신 실제 화재상황을 연출해 어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견줘도 뒤지지 않는 영상을 구현했다. 비슷한 배경의 할리우드 영화 <온리 더 브레이브>와 비교할 때 이는 더욱 두드러진 강점이 된다. 타오르는 숲 가운데서 사투를 벌이는 소방관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찍어낸 작품 중에선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힐 만하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빠지는 것도 아니다. 기존 러시아 영화에서 많이 보이던 영웅주의 색채를 쫙 빼고 크게 거슬리지 않는 수준의 에피소드를 다수 배치했다. 앞서 언급한 헬기 장면과 같은 극적인 부분에서도 세련된 상징과 연출이 돋보인다. 자칫 신파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장르임을 감안하면 상당한 절제다.


2000년 제작된 <리베라 메>와 <싸이렌>이 참혹한 평가를 받은 뒤 한국에선 화재를 배경으로 한 재난영화가 얼마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브레이브 언더 파이어>가 거둔 성취는 놀라운 수준이다. <브레이브 언더 파이어>가 거둔 영화적 성취가 오로지 러시아 영화인들의 실력에만 기댄 것이 아니란 점은 한 사회가 가진 기량이 문화와 예술에 어떤 파급효과를 미칠 수 있는지를 짐작케 한다.


결국 더 나은 사회가 더 좋은 예술의 기틀이 되어주는 것이다.

 

▲브레이브 언더 파이어스틸컷BoXoo 엔터테인먼트



김성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