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게재, <실크 로드> 영화평
가상자산이 뜨겁다.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비트코인은 가벼운 출렁임만으로도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비트코인의 가치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비트코인이 가상세계의 금이 되었다는 사실엔 별반 이견이 없는 듯도 하다.
뜨겁게 달아오른 비트코인을 영화계가 가만 놔둘 리 없다. 틸러 러셀의 <실크 로드>는 개중 가장 발 빠른 영화다. 비트코인으로 마약을 자유롭게 거래하는 오픈마켓 제작자의 이야기를 범죄물의 형식으로 다뤘다. 1995년작 <해커스> 이후 하나의 장르를 이룬 IT계열 범죄물에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해 사실성을 대폭 키웠다.
이야기는 이렇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두뇌회전으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청년 로스(닉 로빈슨 분)는 성인이 된 지금은 뭐 하나 이룬 것 없는 백수 신세다. 비상한 두뇌는 여전하지만 어느 하나를 진득하게 하지 못하고 이 일 저 일 옮겨 다니기 바쁘다. 기대를 건 부모는 로스를 포기한 지 오래, 기껏 데려간 여자친구 앞에서 아버지는 로스가 늘 일을 빨리 포기하는 모습을 지적하며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로스의 포기에도 이유가 있다. 로스는 국가가 통제하는 세상이 영 못마땅하다. 국가가 마련한 제도 위에서 무언가를 하는 건 자신을 기만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부는 국민들을 속이며 그 가능성을 억누르고 세금을 뜯어 착취하는 기생적인 기관이란 게 로스의 생각이다. 전형적인 무정부주의자인데, 불행히도 현 시대, 그것도 미국에선 아나키가 설 자리가 없다.
온라인, 새로운 범죄의 장을 열다
그런 로스에게 발전한 온라인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아마존이나 이베이 같은 오픈마켓 플랫폼을 설계하고, 그 공간에서 국가가 금지한 것들을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로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코딩을 배워 외부에서 통제할 수 없는 자유로운 플랫폼을 현실화한다.
그렇게 탄생한 플랫폼이 실크로드다. 실크로드에서 판매되는 주 품목은 마약으로, 코카인과 대마초부터 필로폰과 아편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마약을 자유롭게 팔고 산다. 거래는 흔적이 남지 않는 비트코인으로 처리하고 서버는 감시를 받지 않는 아이슬란드에 둔다. 사는 이와 파는 이의 정보를 철저히 암호화해 관리하는 건 물론이다.
실크로드가 자리를 잡자 필연적으로 정부의 수사도 이뤄진다. FBI와 마약수사국, 경찰이 공조에 나서고 로스는 조금씩 위기에 몰린다. 타고난 악당도, 베테랑 범죄자도 아닌 로스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영화는 로스가 겪는 심리적 변화를 가까이서 비추며 충분히 있을 법한 범죄의 탄생과 소멸을 그린다.
빨리 뛰진 못하지만 우직하게
영화의 또 다른 축은 수사관이다. 천재적인 젊은이 로스의 맞은편엔 마약수사국 베테랑 수사관 릭(제이슨 클락 분)이 있다. 데미언 셔젤의 세 번째 영화 <퍼스트맨>에서 우직한 우주비행사로 분했던 제이슨 클락이 <실크 로드>에선 몸과 현장을 중시하는 옛 형사가 되어 열연을 펼친다.
채 서른도 되지 않은 명문대 출신 어린 수사관들에게 빈축을 사는 나이든 형사 릭, 그에게 실크로드 수사는 명예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다. 남몰래 온라인 플랫폼부터 결제방식, 플랫폼 운영자에게 접촉하는 방법까지 하나하나 준비해 수사에 임한다. 전 세대의 우직한 형사와 새 시대의 영민한 범죄자가 일대 승부를 벌이는 과정은 <실크 로드>가 공들인 영화의 핵심이다.
실화를 크게 각색한 영화는 실화 그 자체보다는 옛 세대와 새로운 세대를 한 링에 세우는 데 초점을 맞춘 듯 보인다. 새로운 문물에 적응해야 하는 나이든 형사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우직하게 과제를 돌파하는 모습은 제법 감동까지 불러일으킨다.
다만 단점도 있다. 나이든 형사의 감정선에 비해 로스가 다크웹 플랫폼을 개발해 마약판매 오픈마켓으로 활용하는 동기는 단순히 무정부주의적 성향으로 설명하기엔 어색한 부분이 적지 않다. 동기가 명확하지 않다보니 드라마가 약해지고 드라마가 약하다보니 에피소드에 의존하게 되는 악순환이 빚어진다. <실크 로드>를 보고 실망하는 관객이 있다면 태반은 로스의 캐릭터 때문일 것이다.
익숙한 방식으로 새로운 범죄를
<실크 로드>는 이제껏 없었던 범죄를 그린다. 자유주의자가 접근 가능한 기술을 활용해 정부와 체제에 위협이 되는 범죄를 일으킨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막대한 부와 변화에도 단지 몇몇 수사관의 노력만으로 범죄는 가볍게 진압되고 만다.
그리 설득력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해외에 서버를 둔 음란사이트와 도박사이트가 도처에 넘쳐난다. 온라인에서 마약과 총기를 유통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뉴스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 과정에 가상자산이 개입된 사례도 충분히 많다.
제2, 제3의 로스는 분명히 태어난다. 유사한 영화 역시 수도 없이 쏟아질 테다.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으나 수년이 지난 뒤 돌아볼 때 <실크 로드>의 가치가 있었다고 떠올릴법한 이유다. 아마도 다음 나올 새로운 범죄영화는 <실크 로드>를 참조할 것이므로.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