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1

by 김성호

언젠가 한 소년이 살았다.


소년은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을 믿지 못했다.


언젠가 책에서 빛이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돈다는 것을 읽었을 때, 소년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은 나이를 먹어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곧 그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 때 소년은 지식에 대항하기 보다는 그저 '대단하구나'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건 빛이 1초에 지구를 일곱바퀴 반을 돌던 칠십바퀴 반을 돌던, 소년이 아침 9시에 교실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소년이 청년이 되었을 때에도 소년은 빛이 1초에 지구를 일곱바퀴 반을 도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소년에겐 내일 무얼 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비슷하지만 전혀다른 사실인데, 언젠가부터 소년은 단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서 사람들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조금의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처음에 이건 소년에게 무척이나 충격을 주었다. 그때까지 소년은 스스로를 휴머니스트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타인의 고통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 휴머니스트는 스스로 휴머니스트이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때까지 소년은 전쟁은 비인간적이고 파괴적인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전쟁에 분노를 느끼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기아와 불평등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것은 인류 스스로가 당연히 이룩해야 할 숙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어린 휴머니스트의 도움을 필요로 했을 때, 소년은 만화책을 읽는 편을 택했다.


이것은 그들의 아픔이 어린 휴머니스트의 즐거움에 조금의 파동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다. 어린 휴머니스트가 그들의 아픔에 공명할 감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소년은 청년이 되었다.


때때로 청년은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사람들의 행적에 감동하곤 한다. 그들은 청년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자아와 타인의 연결을 느끼기라도하는 것처럼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던진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타인을 위해 스스로의 원칙을 설정한다. 타인을 위해 설정된 원칙은 그 스스로를 위한 것도 된다. 이건 불교에서 말하는 자타불이의 경지와 일맥상통한다.


청년은 생각해 본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불평등에 진정으로 분노할 수 있는 평등주의자를. 지구 반대편의 아픔에 공명할 수 있는 사람을. 타인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을.. 어려운 문제다. 청년은 스스로의 원칙만이라도 지켜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온 몸으로.


청년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어머니는 교회를 다니셨다. 그들은 청년이 소년이었을 때부터 교회에 데리고 나갔다. 하지만 청년은 그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어머니가 믿는 신을 믿지 못했다. 우선 청년은 스스로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덮어두고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이 못된다고 여겼다. 청년이 아직 소년이었을 때, 소년은 다니던 교회의 목사에게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이 지옥에 갔느냐고 물었다. 목사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소년은 다시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소년이 청년이 되었을 때, 청년은 완전한 평등주의자가 되어있었다. 이 무렵의 청년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신의 우편에 앉을 수 있을 뿐, 신을 자신의 왼편에 앉힐 수는 없다는 이유로 기독교 신앙이 불평등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불평등한 사회를 천국으로 꿈꾸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청년이 기독교 신앙을 갖지 못한 진짜 이유가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일요일의 교회에 소년의 친구가 될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만약 소년이 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 성경을 읽는 대신 교회의 예쁜 소녀를 사귀었다면, 지금쯤 청년은 독실한 기독교 인이 되어있을 것이다. 정말 웃기는 이야기다.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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