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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상

FC서울 vs ManUtd.경기를 보고

단상

by 김성호

세계 최고의 팀은 내가 응원하는 팀이다.
- 맨유전으로 보는 일상의 정치

지난 24일 오후 8시, FC서울의 홈구장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FC서울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가 열렸다. 맨유의 아시아투어의 일환으로 열린 이 경기에는 '세계적인 명문구단'의 경기를 보려는 6만5천명의 팬들이 몰려 이들의 대단한 인기를 보여주었다. 사실 이 경기는 지난시즌 그들이 써나간 역사를 밤잠 못이루며 지켜보았을 국내 축구팬들에겐 그야말로 흥분되는 기회였으리라.

3-2, 맨유의 역전승으로 끝난 이 경기는 경기 내적으로 보면 맨유와 서울에게 모두 만족스러운 경기였다. 프리시즌에 감행한 아시아투어에서 그리 만만하지많은 않은 클럽을 맞아 선수들을 점검하면서도 멋진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맨유에게 만족스러웠으며 '맨유'에게 두 골이나 넣으며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는 점에서 서울에게도 만족스러운 경기였던 것이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6만5천의 관중들은 경기가 진행되는 내내 공을 잡은 선수들의 이름을 연호하며 이 진귀한 기회를 만끽했고 루니, 오웬, 퍼디난드, 반데사르 등의 스타선수들이 멋진 플레이를 보여줄 때마다 목청껏 함성을 질렀다. 후반 중반 관중들이 박지성의 이름을 연호했던 장면과 카메라에 퍼거슨 감독이 잡혔을 때 커다란 함성이 터져나온 장면은 이 축제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경기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희미하지만 의미있는 시선이 있다. 바로 K리그를 사랑하는, 매주 자신의 팀을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는, 우리 주변의 축구팬들의 시선이다. 그들은 K리그가 EPL과 동등한 하나의 프로축구리그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응원하는 클럽이 적어도 그들의 리그와 그들의 경기장에서만큼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매주 자기들의 경기장에서 자기들의 팀과 자기들의 선수를 응원하는 그들에게 세계최고의 클럽은 저 영국 맨체스터의 클럽이 아니라 매주 자기들의 응원을 받으며 경기를 펼치는 클럽인 것이다.

맨유가 절대적으로 뛰어난 실력을 갖춘 최고수준의 클럽이라는 데 대해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한 나라의 프로리그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일방적으로 친선경기 일정을 발표하는 것은, 더불어 이 경기로 인한 모든 수익금을 독차지하겠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리그를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런데 이들의 무리한 요구에 직면하여 K리그연맹과 구단이 보인 태도는 충분히 예상가능했지만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

자국 리그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는 팀의 일정을 수정하고 독단적으로 통보된 맨유의 일정에 적극 협조하는 것이 마치 그들의 존재이유이기라도 한 것처럼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키는 열성적인 태도는 그간 리그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모습이었다. 이들의 이런 모습은 스스로 독립적인 리그의 자존심을 지키는 대신 유명 클럽과의 친선경기로 떨어질 콩고물을 얻겠다는 수치스런 태도였다. 대체 이런 연맹에 속해 있는 클럽과 그 클럽의 팬들은 얼마남지 않은 자존심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겠는가.

이 경기를 준비하면서 연맹은 세계적 수준의 클럽과 친선경기를 하는 것이 선수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며 이렇게 모은 관심이 K리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발표했다. 그러나 촉박한 리그일정을 수행해야 하는 서울에게 유명팀과의 이벤트성 경기가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이며 이 경기를 관람한 관중들이 K리그의 관중수 증가로 이어지리라는 기대는 또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서울의 홈경기장을 메운 관중들의 절대 다수가 홈팀인 서울이 아니라 원정팀인 맨유에게 열광적인 응원을 보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들이 K리그의 관중이 될 것이 아니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리고 앞으로 마케팅 측면에서 한국을 방문할 가능성이 있는 '지구 반대편의 또 다른 명문클럽'의 잠재적 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리그의 성장은 결코 이런 이벤트 경기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강한 팀이 강한 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강한 팬이 강한 팀을 만든다. 클럽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사람들로 하여금 경기장을 찾게 만들고 그렇게 쌓인 팬들의 열정이 그들이 응원하는 클럽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선순환에 바탕한 발전만이 리그를 진정으로 발전시키는 길이라 확신한다.

이 경기에 며칠 앞서 벌어진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와 부천FC의 경기를 기억한다. 부천종합경기장에서 벌어진 이 경기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악조건 속에서도 많은 관중들 가운데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글레이저 가문의 맨유인수에 화가 난 맨체스터 시민들이 직접 팀을 창단한 것이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의 시작이었고 부천SK가 제주로 이전한 이후 부천시민들이 창단한 것이 바로 부천FC다. 각기 7부리그와 3부리그에 속해있는 이 작은 클럽들의 결코 작지만은 않았던 경기는 우리 프로축구가 나아갈 길에 대해 커다란 물음표를 그리고 있다.

자국리그의 일정보다 이벤트성 경기를 우선하여 의식있는 팬들의 반발을 불러온 연맹의 결정은 기존의 팬들마저 다른 리그의 클럽들에 빼앗기게끔 하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선두를 다투는 팀의 정규리그 경기에서보다 맨유와의 이벤트성 경기에 훨씬 더 많은 관중들이 자리를 메우는게 바로 K리그의 현주소다. 그리고 한 팀의 홈에서 만원관중들이 상대팀을 응원하는 것 역시 K리그가 처한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팬들의, 팬들에 의한, 팬들을 위한 경기를 치러낸 부천FC의 모습은 쉽게 불붙지 않는 우리들의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를 일으킨다.

어느 나라가 스스로 다른 나라의 식민지임을 인정한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 나라는 완전한 식민지가 되는 법이다. K리그연맹은 하루 빨리 이 사실을 깨닫고 아시아 시장을 오직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보는 해외의 명문구단에 맞서 우리 리그와 클럽들을 근본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결코 어제와 같은 방식이 아닐 것이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응원하며,
2009. 7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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