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남아공 월드컵을 기록하다
남아공 월드컵을 보고
2010 남아공 월드컵을 기록하다
-남아공 월드컵을 보고
1. 아프리카
사상 처음으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열린 월드컵이었다. 역사적인 이유로 개중에서 가장 서구화된 나라라는 남아공에서 개최되었는데 그렇다해도 아프리카 대륙에서 메이저급 대회를 개최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케냐나 기니, 나이지리아 같은 나라에서 월드컵을 개최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 대회를 개최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매끄럽지 못한 모습들이 있었고 아프리카에서 열린 대회이기는 하였으나 정작 주체가 되어야 마땅했을 흑인들의 모습이 그닥 보이지 않아 적잖이 아쉬웠다. 매스컴에 노출된 남아공 현지의 책임자나 경찰들이 거의 전부 백인이었다는 사실은 이번 대회가 가진 상징적인 의미 만큼이나 그 한계 역시도 반영하고 있었다.
월드컵은 결국 축구대회이기에 아프리카가 자기 대륙에서 열린 축제를 만끽하기 위해서는 우선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만 했다. 가나를 필두로 코트디부아르, 카메룬, 나이지리아, 그리고 개최국인 남아공이 32강 조별예선에 참가했는데 가나를 제외하곤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여러모로 축구 변방으로서의 오랜 설움을 떨치기에 좋은 여건이었으나 가나가 8강에 진출한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성과가 없었던 것이다. 가나야 본래 잘 짜여진 팀이니 8강에 진출한 것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에시앙 등의 주축 선수들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8강을 이룩한 사실 만큼은 분명 만족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개최국으로서는 대회 최초로 16강 진출에 실패한 남아공 부터 각종 잡음이 끊이지 않으며 졸전을 거듭한 카메룬과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준 코트디부아르, 그리고 나이지리아까지. 실력있는 선수들을 갖춘 나라답지 않게 그들의 경기력은 기대이하였다. 매 대회 때마다 뛰어난 체격조건과 운동능력으로 다크호스로 지목되곤 했던 아프리카 팀들이지만 이번 대회에서 만큼은 그 자리를 아시아의 팀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이는 자국리그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유명 클럽들의 선수시장으로 머물렀던 아프리카 축구계의 무능함과 큰대회 직전에 외국인 감독을 급작스럽게 기용하고 유명 선수 몇 명에 의지하여 경기를 풀어나가는 근시안적인 태도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아프리카 선수들의 재능이 워낙 특출나기에 축구실력 강화를 위한 보다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한다면 다음 대회에서 진정한 검은 돌풍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 대한민국
남아공 월드컵에 참가한 우리 국가대표팀의 전력이 역대최강이란 평가가 많다. 물론 나도 이에 동감한다. 이는 K리그를 비롯 한국의 축구인프라가 과거에 비해 상당히 성장했기 때문이고 박지성, 이영표와 같이 최고의 리그에서 최고의 선수들과 경쟁하며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선수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과 6년 전 유럽을 제패했던 그리스를 조별예선 1차전에서 2-0으로 격파한 것만 보아도 세계축구와 한국축구의 벽은 과거 만큼 높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축구가 충분히 강했냐 한다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여론이 지배적이었던 허정무 감독의 용병술과 전술이야 차치하고서라도 남아공 월드컵 엔트리에 리그에서의 활약도를 사실상 반영하지 않은 것은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리그에서의 활약이 비참한 선수들이 별다른 문제없이 엔트리에 오른 것은 물론이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제대로 된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감독이 자신이 구상한 전술에 맞는 선수들을 발탁하는 것이야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고유의 권한이지만 합리적인 이유없이 선수를 선발하고 대표팀을 운영하는 것은 비판받을 수 있는 부분임에 분명하다.
지난시즌과 이번시즌 동안 리그에서 두드러지는 활약을 보여줬던 김영후, 유병수, 고창현, 최효진, 김형일, 황재원, 나아가 이천수 같은 선수들을 뽑지 않고 염기훈, 안정환, 이운재, 이승렬, 강민수 등을 차출한 것은 허정무 감독의 성격을 고려하면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동감하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축구팬 중 누구도 김영후, 유병수 등에게 충분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들의 가능성을 시험도 해보지 않고 버린 것은 허정무 감독의 독단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세대교체에 실패한 데다 수비 밸런스까지 완전히 무너진 그리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후 언제 대표팀을 비판했느냐는 듯이 전술이 뛰어나네 경기력이 좋네 아르헨티나도 잡을 수 있다는 듯이 엄청나게 띄워준 언론들을 보고 있자면 대체 그들이 제대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인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이어진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졸전 끝에 4-1로 완패한 것은 허정무호의 능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한 판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르헨티나가 우승후보로 거론되는 이미지에 비해 전술적으로 낭비가 심하고 약점도 많은 팀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 실망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사실 그리스전에서 승리했다고 한순간에 전력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근본적인 문제점들도 해결이 안됐는데 강팀과 맞설 수 있는 준비가 착실히 이루어져 온듯이 보도한 언론부터가 문제였지만 대표팀의 무력한 경기내용은 더욱 큰 문제였다. 이번엔 대진과 운이 좋아 원정16강의 목표를 달성하고 월드컵을 마쳤지만 이런 식으로 대표팀이 운영된다면 중국과 일본 등에게 추월당할 일도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긴 허정무 감독의 후임으로 정해성 코치와 김호곤 울산 감독이 거론되는 것을 보니 대표팀의 앞날은 벌써부터 검게 물들고 있는 듯하다.
3. 광풍
온 세상이 월드컵으로 난리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월드컵이 남아공에서 열리는 축구대회일 뿐이지 않냐고 한다면 월드컵이 사회에 미치는 50가지 긍정적인 영향을 들며 훈계라도 할 기세다. 뉴스에선 연일 월드컵 특집보도로 바쁘고 광고도 온통 월드컵에 관련된 것들 일색이니 그 파급력이 정말이지 대단하다 하겠다. 사람들은 어디서나 월드컵 이야기로 대화의 꽃을 피우고 토토가게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어디 이번 대회 뿐이겠는가.
월드컵이든 올림픽이든 대규모 국가대항전만 열렸다 하면 만사 제쳐놓고 한국의 축구성적에 나의 성쇠가 걸린 듯이 TV 앞으로 모이는 특이한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인 것이다. 다행히 저 멀리 멕시코나 영국, 그리고 남미와 아프리카 등지의 나라들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니 우리만 이상한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응원열기가 높은 것이야 자랑할 만한 것이지만 자기 생활에 직결되는 일들이나 사회생활에 더없이 중요한 정치, 경제적 이슈들을 마다하고 월드컵에만 집중하는 행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라고 생각한다. 월드컵이 분명 지구촌의 큰 축제 가운데 하나이고 우리 대표팀이 무려 본선에 참가해 실력을 겨루고 있다지만 평소에 특별히 축구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던 사람들까지 빨간 옷을 꺼내입게 만들 만큼 중요한 사건처럼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작금의 한국이 사건사고없는 무사태평한 나라도 아닐진대 월드컵 소식에 밀려 온갖 중요한 이슈들이 무시당하는 이러한 상황은 아무리 오픈마이드를 갖고 보아도 이해하기 어렵다. 아니, 이해까진 어찌어찌 하더라도 허용되기 어려운 것이다. 오죽하면 이를 이용하여 악법을 통과시키려는 정치세력이 존재하겠는가. 평소 프로리그 경기가 벌어지는 축구장이 미어터지다가 4년에 한 번씩 거리를 메우는 것이면 이해가 되겠지만 축구에 관심도 없던 평범한 시민들이 4년마다 축구광이 되는 것은 분명히 기형적인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 응원문화
2002년 이후로 월드컵 하면 거리응원을 빼놓을 수 없다. 붉은악마라 불리는 한국의 응원단이 광장을 붉은 물결로 채워넣던 순간은 전율 그 자체였으니 그 때 그 감동을 기억하는 이들이 다시 거리로 나가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광장은 더이상 과거의 광장이 아니다. 붉은 악마의 자발적인 응원의 장이었던 그 곳엔 이제 상업적인 의도로 가득한 기업과 연예인들이 앞장서 대중을 이끌려 하고 있다. 대중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기업과 붉은 악마의 연대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 순수한 의도로 응원에 참여하고 있지 않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들의 목적은 대중이 아니라 홍보인 것이다.
만약 그들이 우리나라의 축구발전에 장기적인 조력자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면 내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일회적인 대회에서의 홍보를 목적으로 하고 있을 뿐 월드컵 이전부터 축구와 관련된 사업을 벌이지도 응원문화의 발전과 관련된 사업을 벌어지도 않았던 이들이다. 대체 그들에게 광장을 장악하고 응원단을 선도할 수 있는 자격이 어째서 주어지는 것인가. 그리고 왜 대중들은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광장아닌 광장으로 나가는 것인가. 이해하기 어렵다.
적어도 2002년의 거리응원은 자발적인 참여와 주체적인 응원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2006년, 그리고 2010년의 거리응원은 더이상 주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저 대중과 합류하여 즐기려는 한 때의 광분에 불과하다. 순수한 응원을 넘어선 광분은 어떠한 긍정적 효과도 낳지 못하며 오히려 그 열기에 의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이성마저 흐려지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거리응원은 2002년과 완전히 달라졌으며 그 동력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
5. 부부젤라
이번 대회에서는 경기 만큼이나 아프리카가 낳았다고 쓰고 중국이 생산했다고 읽는 악마의 악기 부부젤라가 화제를 모았는데 개인적으로 상암운동장 북측 관중석에서 FC서울을 서포터하는 나로서는 그닥 새롭거나 충격적인 광경은 아니었다. 그 무식한 악기라고 쓰고 흉기라고 읽는 막대기를 관중 다수가 계속해서 불어대는 남아공 만큼은 아니겠으나 상암에서도 시끄럽기만 하고 음악적으로는 특별한 쓰임이 없어보이는 악기를 불어대는 인간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만능의 현대사회에서 소외받는 이들이 축구장에서라도 마음껏 존재감을 과시하고자 하는 현대사회의 아픈 단면이 아닐까 한다. 물론 농담이다. 나는 부부젤라를 사랑한다.
6. 응원녀
파라과이의 응원녀 라리사 리켈메가 화제다. 발자국녀니 복근녀니 한국에서 응원녀가 화제에 오를 때는 까대지 못해서 안달이더니 파라과이의 팔등신 쭉빵녀가 유명해지니 온통 찬사일색이다. 그런데 대체 라리사 리켈메와 국산 응원녀의 차이가 무엇이란 말인가. 파라과이 응원녀는 순수한 의도라서 응원한 거고 국산 응원녀는 상업적인 의도라서 깠다면 멍청한 거고 똑같은데 아무 이유없이 그냥 국산만 까댄 거면 개념이 없는 거다. 하지만 국산 응원녀가 못생긴데다 상업적 의도가 뻔히 보여서 욕한거고 라리사 리켈메는 그냥 예뻐서 좋아한 거라면 어느정도는 나도 마찬가지의 의견이다.
7. 독일
이번 월드컵의 가장 주목받는 팀 중 하나였던 독일은 전통의 강호인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를 연파하며 기존의 단단함에 스피드와 공격력을 장착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월드컵 직전 발락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전력누수가 예상됐으나 슈바인슈타이거와 메수트 외칠, 그리고 사미 케디라 등이 그 공백을 잘 메웠다는 평이다.
독일의 젊은 감독 요아킴 뢰브는 이번 대회에서 자기만의 색깔을 낸 많지 않은 감독 중 한 명이고 그래서 독일이 더욱 주목받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같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의외로 빈틈 많은 팀들을 16강과 8강에서 만난 것도 그들로서는 행운이 아닐까 한다.
동진, 낙도, 일용 등과 이야기한 바와 같이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를 연이어 대파한 독일에 대한 평가에 상당한 거품이 끼었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는데 월드컵과 같이 축구판에 일시적인 관심이 증가하는 대회에서는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원래 거품은 일시적인 관심이 증가한 상황에서 끼는 것이 아니던가. 요아킴 뢰브의 독일이 스페인과 같이 잘 만들어진 팀과 경기한 적이 없는 상황에서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등을 격파했다는 사실만으로 스페인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빈틈이 많은 논리가 아닌가 한다.
요아킴 뢰브 감독이 스페인을 맞이하여 이번 대회 내내 이어진 독일의 축구를 시도한 것이야말로, 물론 능력부족으로 곧 반코트게임이 되었지만, 거품에 본질이 흔들린 경우일 것이다. 스페인을 잡기 위해선 독일은 보다 강력하고 거친 압박과 철저한 수비지향의 축구를 했어야 했을 것이다.
8. 뉴질랜드
내게 있어 이번 대회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준 팀은 우승팀인 스페인도 네덜란드나 아르헨티나, 독일도 아닌 뉴질랜드였다. 우승팀인 스페인조차 달성하지 못한 무패의 위엄을 보여준, 물론 3무로 조별예선에서 탈락하긴 했지만, 바로 뉴질랜드였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블랙번 로버스에서 활약하는 수비수 라이언 넬슨이 이끄는 뉴질랜드는 대회 이전까지 최약체로 꼽히는 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두 번째 월드컵에서 3무승부로 승점 3점을 획득했다.
특히 조별예선 첫번째 경기인 슬로바키아전에서의 승점은 월드컵에서 그들이 얻은 첫 번째 승점이었으며 후반 추가시간인 92분 18초에 터진 윈스턴 레이드의 극적인 동점골로 얻은 승점이었기에 더욱 값졌다. 윈스턴 레이드는 유니폼을 벗어던지며 환호했고 뉴질랜드의 팬들과 그 경기를 본 전세계의 축구팬, 그리고 나 역시도 감동했다. 나는 이번 대회 최고의 팀으로 뉴질랜드를, 최고의 골로 그들에게 첫 승점을 선사한 이 골을 꼽을 것이다.
9. 감독
최고의 팀과 최고의 골을 꼽았으니 최고의 감독과 최고의 선수도 꼽아야 겠다. 최고의 선수는 누가 봐도 혼자서 꾸역꾸역 우루과이를 밀어올린 포를란이니 최고의 감독이 상대적으로 흥미로울 듯한데 우선 후보를 나열해 볼까 한다.
이번 대회에서 축구다운 축구, 전략이라 할 만한 전략을 들고 나온 팀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 중에서 내 마음에 들었던 팀은 비센테 델 보스케의 스페인과 마르셀로 비엘사의 칠레, 둥가의 브라질, 요아킴 뢰브의 독일, 오트마 히츠펠트의 스위스 정도였다.
2008년부터 이어져 온 스페인의 축구는 그들의 별명인 '무적함대'다웠고 칠레와 독일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들과 정면으로 맞설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중 독일은 의도한 무엇도 해보지 못하고 비참한 패배를 당했을 뿐이다.
선수단 장악능력이 뛰어나기로 알려진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은 스페인에 새로운 전략과 스타일을 불어넣기보다는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출신의 선수들로 양분된 선수단의 조화를 이루는데 집중한 듯 보인다. 그 결과 스페인은 2008년의 강함을 어느정도 유지한 듯 보이고 그들을 상대로 극단적으로 라인을 끌어내린 뒤 자리를 지키는 축구를 한 상대들을 연파하며 월드컵을 차지할 수 있었다. 승자보다 강한 자가 없다면 비센테 델 보스케야 말로 이번 대회 최고의 감독일 것이다.
그리고 오트마 히츠펠트. 유럽축구를 처음 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도르트문트와 바이에른 뮌헨을 이끌며 분데스리가와 유럽 챔피언스리그를 제패했던 그가 스위스를 맡아 비센테 델 보스케의 스페인에게 유일한 패배를 안길 줄 누가 알았을까. 각기 레알 마드리드와 바이에른 뮌헨에서 유럽의 패권을 다퉜던 두 감독이 월드컵 조별예선 첫경기에서 맞붙다니 이것도 참 지독한 인연이다 싶다.
라인을 끌어내림으로써 스페인의 공간활용을 철저히 차단하고 빠르고 깔끔한 역습으로 득점을 노리는 효율적인 축구로 그들은 우승후보이자 세계최강 스페인으로부터 승리를 따냈다. 비록 약한 전력과 주전선수들의 부상 탓에 16강 진출에 아쉽게 실패했지만 스페인전에서 보여진 스위스와 오트마 히츠펠트의 모습은 결코 약해보이지 않았다.
2002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이끌며 겨드랑이에 습기찬 남자로 강인한 인상을 심어준 마르셀로 비엘사 감독의 칠레도 멋진 축구를 한 팀 중에 하나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이번대회에서 스페인을 상대로 수비축구를 지향하지 않은 유일한 팀이자 공격적인 용병술과 아기자기한 조직력, 선수 개개인의 뛰어난 개인기로 브라질을 만나기 전까지는 순항을 거듭한 팀이다. 화려한 공격축구를 지향한 마르셀로 비엘사 감독의 칠레는 분명히 이번 월드컵의 인기팀 중 하나였다.
그런 칠레를 격파했지만 8강에서 네덜란드에게 덜미를 잡힌 둥가의 브라질은 이번대회 가장 재수없는 팀 중 하나일 것이다. 선수들의 뛰어난 개인기와 스피드를 앞세운 화려한 공격축구 대신 두명의 처진 중앙미드필더를 세우는 단단한 수비축구를 바탕으로 우승에 도전했던 둥가의 브라질은 그 압도적인 강함에도 불구하고 사인미스로 인한 자책골과 멜루의 개념없는 퇴장으로 8강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스페인과 함께 이번 월드컵의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던 팀답게 매경기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지만 이렇게 허망하게 탈락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잉글랜드, 아르헨티나를 완파하며 독일축구가 건재함을 만방에 알린 요아킴 뢰브의 독일은 안정된 수비와 빠른 공수전환, 뛰어난 골결정력으로 팬들을 사로잡았는데 4강에서 우승팀인 스페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강력한 우승후보로 예측되기까지 할 정도였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클린스만의 독일이 보여준 단단한 축구에 스피드를 더한 요아킴 뢰브의 화끈한 스타일은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라는 인기팀을 완파하며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과의 맞대결에서 전략과 실력 모두에서 패배한 독일은 3,4위 결정전에서 우루과이를 격파하며 간신히 체면치레를 했을 뿐이다. 만약 독일이 결승전에서 네덜란드가 보여준 것처럼 거칠고 타이트한 압박과 선수비후역습의 전략을 들고 나왔다면 그리도 무력하게 패배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해본다.
10. 세계화냐 획일화냐
2008-2009시즌 유럽축구계를 군림했던 바르셀로나와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격돌한 거스 히딩크의 첼시는 최소한의 공격수를 제외한 선수 전원을 자기진영 깊숙히 끌어내린 수비축구로 바르셀로나를 탈락의 문턱까지 데리고 가는데 성공했다. 비록 문어대가리의 활약으로 결승진출에 실패했지만 그 해 바르셀로나를 가장 위협한 팀은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가 아니라 히딩크가 이끄는 첼시였다.
2009-2010시즌 여전히 최강으로 군림하던 바르셀로나는 결승에서 주제 무리뉴가 이끄는 인터밀란과 만났다. 미드필더들의 기술적 우위를 기반으로 짧고 정확한 패스를 통해 상대 미드필더들을 무력화시키며 전진하는 스페인 특유의 축구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듣는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무리뉴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공을 갖지 않고도 상대를 격파하는 실리축구의 완성판을 내어놓으며 챔피언스리그 왕좌를 차지했다. 기존의 전술을 통한 맞대결로는 어느 팀도 바르셀로나를 꺾지 못하는 상황에서 2009년의 히딩크와 2010년의 무리뉴는 나름의 공략법을 내놓은 것이다.
수비라인을 내리고 철저하게 라인을 지키는 축구를 통해 상대에게 공간을 주지 않고 최소한의 전력으로 빠르고 효율적인 역습을 통해 득점을 노리는 지지않는 축구는 실리축구라는 이름으로 2010 남아공 월드컵에 등장했다. 전력이 약한 팀이 강한 팀을 상대로 거의 전원수비에 가까운 전략을 들고 나온 사례가 없지는 않았으나 이번 대회에서처럼 나름대로 강한 전력을 구축한 팀이 기존의 팀컬러와 상관없이 철저하게 준비된 방식의 전술 아래 수비지향의 축구를 하는 것은 지극히 보기 드문 경우였기에 축구팬들의 관심을 모았다.
세계화는 다양한 지역적 문화를 획일화된 하나의 문화로 규합한다고 하던데 이번 대회에서 보여진 양상이 꼭 그러하지 않았나 싶다. 단 한 번의 패배가 곧 실패로 직결되는 토너먼트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전술을 사용하는 것이 정답이라 생각한 것이겠지만 각 팀이 오랜동안 발전시켜온 전술과 특색들이 승리를 위한 획일화 된 기조 속에서 무너졌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길로 가더라도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믿고 자신들의 장점을 극대화하는데 집중했던 과거의 축구를 백가쟁명의 시대에 비견할 수 있다면 어느 팀을 보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전술과 스타일을 보였던 이번 대회는 축구에 있어 백가쟁명의 시대가 종언을 고했음을 말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월드컵을 품에 안기위해 강함을 추구하는 것은 장려받아 마땅한 일이기에 이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각기 다른 스타일의 축구가 최강을 가리기 위해 격돌하는 현장을 목격하고자 했던 축구팬들의 입장에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 언젠가는 더욱 강한 축구가 지금의 축구를 밀어내리라는 것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바이다.
2010. 7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