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1.
이번에도 봄은 한꺼번에 닥쳐왔다.
그리고 나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다.
질퍽거리는 눈 쌓인 들판에도, 벌레들 우글거리는 들짐승 똥 위에도, 물방울 떨어지는 286초소 지붕 위에도, 어느새 겨울은 가고 봄이 왔다.
어느 순간 가벼워진 여인들의 옷차림에서, 쉴새없이 조잘대는 아이들의 옆모습에서 '아! 또다시 봄이 왔구나' 하고 뒤늦은 탄식을 내뱉던 무신경함은 이곳에서조차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 모양이다. 성큼 다가온 봄의 얼굴을 여전히 겨울인채로 마주하게 되자 문득 나는 부끄러움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조금은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되었다.
2.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녹으면
온 세상을 백색으로 물들였던 눈이 녹아 흐르면
온갖 곤충들이 대지 위로 기어나와 다니면
이름모를 새들이 저마다의 소리로 지저귀면
앙상했던 가지에 녹색 숨결 움트면
매서웠던 바람에도 남쪽 온기 실리면
22고가 삭막한 벽면에도 봄기운이 돌겠지.
3.
22고가 벽면에 새겨진 수많은 이름들을 조용히 불러본다. 때론 그리움으로 권태로 분노로 절망으로 저주하며 새겨간 수많은 낙서들이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풍화되고 있다. 이 낙서들도 언젠가는 모두 벗겨지고 그 위에 새로운 페인트가 발라지겠지만 그리되었다해서 이 감정들이 의미없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기억해주어야만 한다.
4.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한 어느 시인은 마침내 죽어갈 모든 것들이 태어나는 달이기에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겠지만 그라고 몰랐겠는가. 한편으로는 한 평생 살아갈 것들이 태어나는 찬란한 달이라는 것을.
5.
K, 나는 너에게 맑은 볕에 잘 말려진 들꽃들을 보내었으나 사실은 이 봄을 전부 싸서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2011. 4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