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상

쩨브뤼헤에서

바다

by 김성호

북해 두 번째 기항지는 벨기에 서북부 쩨브뤼헤(Zebrugge). 동부의 앤드워프(Antwerp)와 함께 벨기에 물류를 책임지는 주력 항만으로 유럽에 흔치 않게 바다와 직접 면한 해항이다. 플리싱언과는 해로로 24마일, 출항 두 시간 만에 항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쩨브뤼헤의 쩨는 벨기에 말로 ‘바다’, 바다 브뤼헤란 뜻이다. 500여 년 전 항구도시로 번성한 브뤼헤 앞에 토사가 퇴적돼 큰 배가 들기 어렵게 되자, 19세기 말 운하를 파고 외항을 정비한 게 오늘에 이르렀다.

쩨브뤼헤 항만엔 갑문이 설치돼 있다. 갑문은 조차가 큰 경우에도 배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한 설비로 조차가 큰 북해엔 갑문이 있는 항구가 여럿이다. 앞뒤로 갑문이 설치된 도크Dock 안에 배가 들면 문을 닫고 안에 물을 넣거나 빼서 항 안(혹은 바깥)의 수위와 맞추는 식으로 작동한다.

폭이 좁은 갑문 안에 큰 배가 들어가고 나와야 하니 갑문이 있는 항구에선 갑문도선사(Lock Pilot)를 태우는 게 보통이다. 갑문도선사가 갑문 안에 배를 넣고 수위를 맞춘 뒤 일반도선사와 교대해 부두에 배를 붙이는 게 통상의 절차다.

쩨브뤼헤 갑문은 다리가 수직으로 들리는 도개교 형태인 게 특징이다. 물 밑에 잠겨 미닫이문처럼 열리고 닫히는 보통의 갑문과는 다른 형태다. 배가 다가서면 갑문을 막은 다리가 수직으로 들려 지나갈 공간을 확보하고, 배가 안으로 들어서면 다리를 다시 내려 배를 가둔다. 이후 갑문 안에 물을 넣거나 빼, 배가 나갈 곳과 갑문 안쪽의 수위를 맞춘다. 영국 런던의 타워브릿지, 부산의 영도대교처럼 쩨브뤼헤 갑문도 평상시엔 차가 다니는 다리 역할을 수행한다.

쩨브뤼헤 갑문이 도개교로 설계된 건 항구가 주거지역과 바로 닿아 있기 때문이다. 갑문 옆에 수십 채의 집과 작은 공원들이 조성돼 있어 배 위에서 마을 전경을 그대로 조망할 수 있다. 가방을 메고 어딘가로 바삐 뛰는 청년 뒤로 붉은 치마를 입은 소녀가 헤드폰을 끼고 춤추듯 걷는다. 두 손 놓고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을 향해 차고 앞에 선 노인이 뭐라 뭐라 외친다. 내게 그들이 그렇듯, 그들의 시선에선 상선들의 왕래도 익숙한 풍경일 테다. 세상의 저편에서 물건을 실어 이편에 내려놓는 상선이 익숙한 삶이라니, 이들은 과연 얼마나 큰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일까.

쩨브뤼헤에선 상륙을 나가는 선원이 많다. 항구로부터 시내가 가깝고 볼 것도 살 것도 많은 탓이다. 나도 시간이 맞는 선원 몇과 함께 상륙에 나섰다. 선원복지클럽(Seamans club)에서 달러를 유로로 바꿔 시내로 나가는 택시에 오른다. 상륙지에서 선원이 찾는 것이야 빤하다. 카지노, 여자, 술, 음식, 마트, 그리고 무엇이 더 있을까?

저마다 원하는 게 다를 땐 누구도 싫어하지 않을 곳을 고르면 된다. 우리는 먼저 카지노를 들렀다가 분위기 좋은 해변 식당을 찾기로 한다. 마흔 줄에 접어든 타수는 마치 오래 전부터 제 자리였던 듯 블랙잭 테이블에 앉았고, 나머지도 여기저기 구경에 나선다. 나는 작은 공이 돌아가는 룰렛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도박사로서의 내 운명을 시험하기로 한다. 몇 년 전 취재 차 만난 도박중독자는 도박장에선 잃는 게 따는 길이라 충고했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운이 좋다.

시계는 밤을 가리키는데 날은 저물 줄을 모른다. 해변은 맨발로 축구하는 아이들 차지,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저마다 개 한 마리씩 앞세워 산책에 나섰다. 우린 가장 붐비는 가게에 들어가 낯선 메뉴판에서 와플과 맥주를 찾아 헤맨다.

잘 알려진 것처럼 벨기에는 와플과 맥주, 초콜릿이 유명하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를 더 한다면, 그건 예술이다.

중세의 끝자락, 유럽 북부의 낮고 넓은 땅에서 일어난 움직임이 오늘의 벨기에를 만들었다. 기술발달로 생산량이 늘어난 물자가 창고에 쌓이기 시작하자 상인들은 다른 지역과 더 많고 잦은 교역을 원했다. 자연히 항만을 갖춘 도시로 물자가 옮겨졌고 도시들은 교역을 통해 이전엔 꿈꾸지 못한 부를 쌓았다.

부유한 상인들은 한자동맹이라 불리는 느슨한 동맹체제를 구축해 왕의 통치로부터 독립된 영역을 확보하고자 했다. 낮은 땅이란 뜻의 플랑드르 지역이 가장 큰 부를 얻었고 이 동맹의 중심을 이뤘다. 지금의 벨기에는 플랑드르에서 태동했다.

부는 여유를, 여유는 예술을 부르는 법이다. 얀 판 에이크를 필두로 렘브란트, 루벤스, 페르메이르와 같은 화가들이 주도한 플랑드르 화풍을 지나 상징주의와 표현주의, 초현실주의의 흐름이 차례로 일어났다. 미술역사에 이름을 아로새긴 페르낭 크로프, 제임스 엔소르, 그리고 르네 마그리트가 모두 벨기에에서 활약한 화가다.

그림의 시대가 저물고 영상의 시대가 열린 오늘, 벨기에 영화인의 활약상도 두드러진다. <토토의 천국> <제8요일>의 자코 반 도마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차지한 장 피에르 다르덴·뤽 다르덴 형제가 벨기에 출신 영화감독이다. 영화라면 어디서 빠지지 않는 나지만, 이들 앞에 설 영화인은 얼마 알지 못한다.

벨기에의 수많은 예술가 가운데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는 단연 르네 마그리트다. 브뤼셀을 무대로 20세기 중반에 전성기를 보낸 그는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쌓아올렸다. 사물을 절묘하게 비틀어 그 안에 깃든 본질을 끌어내는 마그리트의 작품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사고의 틀 자체를 시험하게끔 한다. <매트릭스 3-레볼루션>에서 복제된 스미스 요원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겨울비Golconde’, 지브리 스튜디오의 명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모티브가 된 ‘피레네의 성The castle in the pyrenees’이 널리 알려진 마그리트의 작품이다. 그밖에 ‘연인 The Lovers’ ‘투시 Clair Vayance’ 같은 작품도 있다. 보는 순간 “아!” 하고 경탄할 수밖에 없는 걸작들이다.

쩨브뤼헤의 거리를 걷다 만난 작은 화랑에서 나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았다. ‘이미지의 배신 La trahison des images’이라 이름 붙은 작품이다. 캔버스에 파이프를 그려놓고 바로 아래에 프랑스어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Ceci n’est pas une pipe”라고 적었다. 파이프지만 파이프가 아닌, 그림이지만 여전히 파이프인, 그리하여 파이프와 그림, 이미지와 언어의 본질을 고민하게끔 하는 작품. “이게 뭐 대단해?”하며 지나칠 이들도 있겠으나 예술이 이룰 수 있는 최고수준의 성취를 이 그림 한 장이 이뤘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림과 실제는 다르다. 실재하는 파이프와 그걸 보거나 생각해서 그린 그림은 같을 수 없다. 경험도 마찬가지, 배에 대해 배우는 것과 배를 직접 겪어내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내가 바다를, 사람을, 삶을 안다고 믿었다. 그 모두를 겪은 뒤에야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알지 못했음을 알았다.

과하지욕(跨下之辱)이란 말이 있다.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고사로,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우는데 제일가는 공을 이룬 대장군 한신(韓信)의 이야기다.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모르는 이도 있을 테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별 볼일 없는 집안 출신으로 가난하게 자란 한신은 어엿한 성년이 되고도 일을 하지 않아 주변의 미움을 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장례를 치를 비용도 없었는데, 이런 가운데서도 허리춤에는 늘 큰 칼을 차고 다녔단다. 빈대처럼 주변에 밥을 빌어먹으면서도 당당한 태도로 일관하는 그를 좋아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느 날 한신이 길을 걷다 불량배와 마주쳤다. 평소 한신을 우습게 생각한 불량배는 그의 앞을 가로막고 다짜고짜 욕을 퍼부었다. “네 놈이 덩치가 크고 큰 칼 차기를 좋아한다만 실은 겁쟁이에 불과하다. 네가 용기가 있다면 그 칼로 나를 찌르고, 그럴 용기도 없다면 내 가랑이 밑을 기어서 지나가라!” 몰려든 구경꾼들 앞에서 한신은 허리를 굽혀 불량배의 다리 사이를 기었다. 사람들은 이후 오랫동안 한신을 ‘바짓가랑이 아랠 지난 놈’이라며 비웃었고 사마천은 이를 역사에 기록했다.

처음 이 장면을 접했을 때 나는 한신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장례를 치를 돈은 없어도 직접 어머니를 업어 일만 호를 굽어보는 높은 산 위에 무덤을 쓴 일화며, 매 끼니 얻어먹으면서도 은덕을 갚겠다고 호언장담하는 태도, 끝끝내 큰 칼 차고 대로를 걷는 건 포기하지 않는 모습까지 모두가 한신이란 인간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나는 군대에 입대했다. 불러주는 곳은 죄다 걷어차고 직접 골라간 부대, 전방의 고립되고 열악한 곳을 찾아 제 발로 간 그곳에서 나는 한신의 결정이 얼마만큼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비로소 실감했다. 스스로 산 고난이라며 남몰래 흐뭇해하던 내가 도대체 얼마나 어리석은 건지 깨닫는 데는 단 하루면 충분했다.

그곳에서 나는 자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와 마주쳤고 거의 모든 것들이 내게 포기해야 할 것을 이야기했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거나 양보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음을 알았으나, 포기하지 않아야 할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양보하지 않아야 할 것을 양보하지 않는 것이 때로 지나치게 불편하고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 둘의 괴리는 늘 나를 괴롭혔다.

하나를 포기하니 두 번째는 좀 더 쉬웠다. 포기한 목록은 금방 한 다스를 넘어섰다. 그러다 문득 내가 노예처럼 말하고 노예처럼 행동하며 급기야 노예처럼 생각한다는 걸 자각한 때가 있었다. 생각하는 대로 살고자 했는데 사는 대로 생각하기 바빴다. 참 많이도 버거운 시절이었다. 분단의 철망 앞에서 보낸 일 년 동안 나는 고난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그 고난을 겪어내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를 절감하였다.

배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낮아지기로 결심하는 것과 실제로 낮아지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의미 없는 술자리에 강제로 불려나가 온갖 술주정을 받아내는 것과 누군가의 열등감을 조용히 속으로 감내하는 것, 그밖에 자잘한 시비들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 자존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존감을 지켜내는 건 약자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볼테르는 그의 역작 <불온한 철학사전>에 자존심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를 기록해두었다. 이야기는 인도를 여행하던 한 선교사가 죄를 지은 다른 인도인 대신 채찍질 당하는 탁발승을 본 장면으로 시작한다. 온 몸에 쇠사슬을 감은 채 채찍질 당하는 탁발승 곁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안타까워하며 동전을 던져주었단다. 그 중에 한 사람이 탄식하며 말한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자신을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에게 탁발승이 답한다. “나 자신을 버리다니! 잘 알아두시오, 지금 이 세상에서는 내가 채찍을 맞지만 다음 세상에서는 되돌려 줄 것이오. 그때 당신들은 말이 될 거고, 난 그 말을 타고 다닐 거요.”

자존심은 인간을 지탱한다. 불량배 가랑이 아래를 기면서까지 한신이 지키려 한 것도 자존심이다. 큰 칼 빼어 내리치는 건 쉬운 일이나 그리하면 세운 뜻을 이룰 수 없다. 대장부의 오늘이 내일보다 열악한 건 당연한 일이지만 뜻을 향하지 않는다면 대장부일 수 없다. 그날 한신의 길은 불량배 가랑이 아래에 나 있었고, 오늘 내 길은 이 배 위에 난 것 뿐.

어느 뛰어난 예술가가 말하길, 누군가 나보다 훌륭한 말을 해 놓았으니 자신 없으면 베끼라고 했다. 볼테르는 이야기의 끝에 이렇게 적었다. ‘사람이면 누구나 얼굴이 있다는 걸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사람이면 누구나 자존심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 자존심은 우리가 스스로를 지탱하게 해 주는 수단이다. 인류의 영속성을 지탱하는 수단과 비슷한 것이다. 자존심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소중하며 우리를 기쁘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숨겨야 하는 것이다.’ 실습항해사로 보내야 할 9개월의 시간, 나의 자존심도 그와 같다.


2018. 5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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