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이제 독일이다. 유럽에서 가장 큰 자동차 수출입항 브레머하펜Bremerhaven이 북해 세 번째 항구다. 컨테이너 부두를 지나 깊은 곳에 위치한 자동차 부두에 닿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모래톱 늘어진 베저 강(Weser Fluss) 하구에 이토록 큰 항만을 건설하다니, 독일의 저력이 대단하다. 이 항만을 거쳐 수입·수출되는 자동차가 한 해 230만대를 상회한다. 단순계산해도 하루 6000대가 넘는 양이다. 한국 최대 자동차 항만인 평택항의 두 배 가깝다.
배가 부두에 다가서니 희고 검은 차들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하나 같이 벤츠와 BMW, 아우디 같은 명차들이다. 독일이 자동차 강국이란 말이 실감난다.
선석마다 자동차선이 붙어 분주히 차를 싣고 내린다. 부두에서 배가 떨어지면 기다렸다는 듯 다른 배가 자릴 채운다. 우린 이곳에 000대의 차를 내린다. 사흘 동안 작업이 진행된다.
작업이 길면 선원은 편하다. 배는 전 선원이 동원되는 입·출항이 아닌 다음에야 4시간 단위의 당직 체제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배가 부두에 붙자 당직이 아닌 선원들은 죄다 상륙준비에 들떴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5월은 브레머하펜이 자랑하는 축제, ‘Sail Bremerhaven’이 열리는 달이다. 마침 우리가 도착한 24일이 전야제란다. 항만 근처에서부터 돛대 높은 범선들이 눈에 띈다 싶더니 축제의 주인공이 범선이란다.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던 각양각색 범선들이 축제기간엔 이곳 브레머하펜을 찾는다. 도착한 배는 상갑판을 일반에 개방하고 관람객에게 술과 음식을 파는데 이렇게 벌어들인 돈은 다음 항해를 위한 경비에 보탠다.
길쭉한 내항을 따라 돛대가 달린 배가 줄지어 정박했다. 17세기 캐리비안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 보이는 낡은 배부터 세련된 외양의 대형 요트까지, 각양각색 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페인의 갤리온을 재현한 배 갑판엔 벌써 관람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식민지에서 거둔 수확물을 운송하던 스페인 함대의 위용은 찾을 길 없지만, 축제 한 가운데서 다른 배들과 어우러진 모습도 보기에 나쁘지 않다.
각국 해양학교 실습선도 속속 모여든다. 앳된 모습이 역력한 러시아 학생들은 긴장한 빛으로 물품을 나르는데 열심이다. 독일 특산품이라 할 만한 맥주며 소시지가 배 위로 잔뜩 올라간다. 배에서는 일상인 것이 구경꾼에겐 좋은 볼거리다. 쏟아지는 시선에 학생들을 지휘하는 교관 어깨엔 잔뜩 힘이 들어갔다. 제복을 빼입은 네덜란드 여학생들은 무리지어 노점 구경에 나선다. 고만고만한 물건들을 들춰보며 웃고 떠드는 게 꼭 소풍 나온 아이들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분위기에 젖어 노래를 부르고 맥주를 들이켜는 순간에도 선원들은 돛대에 올라 여기저기 망치질을 해댄다.
이날 축제에 참가한 배 대부분은 기관을 장착한 기범선이다. 돛대를 갖추긴 했지만 실제 항해는 기관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바람이 일정하고 장애물도 없는 먼 바다로 나가면 기관 없이도 항해가 가능하겠지만 연안에서야 언제나 변수가 많다. 항만 밖에서 돛을 편 범선을 보기 어려웠던 것도 그런 이유다. 하지만 축제의 분위기를 내는 데는 조금도 문제될 게 없다.
축제는 내보일 게 있다는 자랑이며 자부심의 결실이다. 좋은 것을 꺼내 보여 함께 즐기는 것, 그게 축제의 본질이다. 축제는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주민 뿐 아니라 외지인들도 끌어들여 한 데 섞는다. 축제를 통해 도시의 문물이 타지로 전파되고 타지의 문화도 도시 안에 녹아든다. 축제는 도시와 사람들을 키운다.
유럽엔 축제의 전통이 뿌리 깊다. 서구 문명의 기원이라 할 만한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는 끊임없이 축제가 열렸다. 특히 아테네는 축제의 도시라 불러도 될 정도, 거의 매달 크고 작은 축제가 벌어졌다. 축제기간이면 그리스 전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장기체류했다. 아테네 사람들에겐 그리스 문화를 선도한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그 자부심이 축제를 통해 표현됐다.
브레머하펜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커다란 자랑으로 배와 항해를 꺼내들었다. 주먹구구식으로 짜낸 것이 아니라 도시의 뿌리 깊은 자산이 그대로 우러난 행사다. 돌아보니 도시 전체에 항해와 관련된 상징물이 가득하다. 콜럼버스 센터로 이름 붙은 건물은 범선의 돛 모양으로 우뚝 섰고 오래된 등대들은 도시 여기저기 자연스레 어우러졌다. 크고 작은 박물관이 항해와 관련된 물건을 전시하고 보도블록엔 각 지역의 위도와 경도가 새겨져 있다. 사람들은 횡단보도를 건너듯 도개교 위를 걷는다. 브레머하펜 사람들은 바다를 받아들였고 그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을 자랑으로 삼는다. Sail Bremerhaven은 브레머하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드러내는 멋진 축제다.
2018. 5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