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상

아카바에서

바다

by 김성호

수에즈를 빠져나온 크리스탈호는 뱃머리를 동북향으로 틀었다. 다음 항구인 요르단 아카바Akahba가 동북쪽 시나이반도와 아라비아반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나이반도는 아프리카와 중동지역 사이에 삼각형이 뒤집힌 형태로 놓인 반도로 동으로 아라비아반도 서북부와 긴 해안선을 놓고 마주섰다. 우리는 두 반도 사이 좁고 긴 해협을 따라 꼬박 하루를 거슬러 올라간다.

아카바는 사우디아라비아 접경에 위치한 요르단의 하나뿐인 항구다. 1946년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분리·독립한 요르단이 이 항구를 얻기 위해 치른 대가는 유명하다. 1965년 단 12킬로미터(km)에 불과한 해안선을 얻기 위해 요르단은 사우디아라비아와 긴 협상을 벌여 6000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사막지대를 떼어줬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내어준 땅에서 검은 액체가 펑펑 뿜어져 나온다. 아랍의 금, 석유였다.

예상보다 훨씬 비싼 값을 치러야 했지만 이 거래가 요르단의 손해라고 단정 짓기는 이르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라는 강대국에 포위된 요르단 입장에선 아카바만과 홍해를 거쳐 인도양으로 통하는 이 항구가 막힌 숨통을 틔워주는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아카바항이 아니었다면 요르단은 사막에 갇힌 내륙국가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을 테니 풍부한 유전을 통째로 지불한 것도 과한 값만은 아닐 테다. 삼면이 바다인 한국의 지정학적 조건이 얼마나 귀하고 다행한 것인지 새삼 실감나는 대목이다.

아카바만이라 불리는 해협은 시나이반도와 아라비아반도라는 커다란 땅덩어리 두 개가 갈라진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좁다. 해협을 거슬러 올라가는 내내 양쪽 해안의 형태가 뚜렷이 내다보이는데 나무 한 그루 없이 삭막한 풍경이 할리우드 영화 속 화성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사실 이 지역 풍경을 보며 화성을 떠올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달이나 화성처럼 척박한 공간을 영상으로 구현하려는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종종 요르단의 네푸드 사막에서 촬영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맷 데이먼이 출연한 영화 <마션>도 그 가운데 하나로, 네푸드 사막 가운데 있는 해발 1000미터(m) 고지대 와디럼에서 촬영했다.

요르단은 외국 영화나 드라마 제작팀에게 인기 있는 로케이션 장소다. 산호초가 유명한 아카바항과 이색적인 풍경의 네푸드 사막 등 매력적인 자연환경에 더해서 중동지역에선 드물게 숙련된 기술 인력을 보유한 덕분이다. 한국 드라마 <미생>이 첫 회와 마지막 회를 요르단에서 촬영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박진감 넘쳤던 첫 회는 수도 암만Amman에서, 미생이 완생으로 거듭나는 마지막 회는 페트라Petra에서 촬영해 멀리 한국까지 요르단이란 나라를 알렸다.

<미생>이 요르단을 로케이션 장소로 선정한 데는 역사적·지정학적 의미가 주요했다. 페트라와 암만은 고대 중개무역으로 번성한 나바테아 왕국의 도시로 아라비아 남부부터 홍해 연안, 지중해와 서아시아까지를 오간 대상(隊商)들이 반드시 거치는 길목이었다. 미생이었던 한 청년이 세계를 누비는 종합상사맨으로 거듭나는 장소로 페트라만 한 곳도 없었을 것이다.

고대엔 풍요를 구가한 요르단이지만 오늘의 삶은 녹록치 않다. 다른 중동국가와 달리 에너지를 전량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주변국과의 관계도 유동적이라 안정적인 에너지 수입도 기대하기 어렵다. 여러모로 제조업이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요르단은 아카바에 희망을 걸었다. 세계적인 경제도시로 거듭난 UAE의 두바이를 성공모델 삼아, 요르단은 아카바를 특별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해 육성하는 중이다. 이곳에선 5% 내외의 법인세를 제외한 모든 세금이 면제되고 투자나 상행위와 관련한 각종 규제도 철폐된 지 오래다. 국내외 법인의 배당금과 이익 송금에도 제한이 없으며 아카바를 통하면 비자도 필요 없이 출입국이 가능하다. 엄청난 혜택이다. 아카바는 이 같은 조치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도시 아카바가 일 년에 한 달씩 걸음을 멈춘다. 라마단 때문이다. 이슬람의 중요의식인 라마단이 사람들에게 낮 동안 어떤 음식과 물도 먹거나 마시지 못하도록 하고 있어 사람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온갖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국제도시 아카바를 만들겠다던 요르단 인들도 라마단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나 보다.

크리스탈호가 아카바항에 입항한 6월 10일은 라마단이 정점을 향해 치닫던 때였다. 낮 동안 금식하기를 보름 넘게 했으니 다들 신경이 예민할 대로 예민하다. 중동의 뜨거운 태양 아래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일을 해야 하는 노동자들은 정도가 더 심하다. 능률이 좋을 수가 없다.

크리스탈호에 올라 입항작업을 책임진 도선사는 줄을 묶는 부두 노동자들을 내려다보며 한껏 짜증을 부려댄다. 배가 선석에 붙으면 줄을 비트에 묶어 배가 움직이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항만 노동자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눈에 봐도 어기적어기적 움직이는 모습이 답답하긴 하겠다. 심지어는 아래 묶어야 할 줄과 위에 묶어야 할 줄을 혼동해 시간이 지체되기까지 한다.

한껏 짜증이 치민 도선사가 노동자들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른다. 내용이야 빤하다. 지면에 옮길 수 없는 내용이겠지. 그러고도 분이 삭지 않는지 영어로 선원들에게 부두 노동자 욕을 한참 쏟아내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다. 앞쪽에서 줄을 묶는 이들은 하루 종일 여자만 생각하고 뒤쪽은 배가 고파서 미쳐버렸단다. 앞은 Fucking이고 뒤는 Crazy라 합치면 Fucking Crazy니 자기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뭐라 해줄 말이 없다.

얼마 전 떠나온 브레머하펜항에서 만난 도선사는 크리스탈호에 붙은 예인선Tug 선장이 대단한 프로페셔널이라 극찬했었다. 예인선이 90도로 꺾이는 구간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크리스탈호를 끌며 도는데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도선사인 자기가 예인선에 무슨 지시를 하든 부족함 없이 척척 수행해내는 것이 상당히 똑똑한 사람이 분명하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한다. 옆에서 아무생각 없이 출항작업에 몰두하던 선원들은 도선사의 말에 역시 독일이 선진국이구나, 저 선장은 참 배를 잘 모는구나 하고 감탄했었다.

선원들에게 항구는 그 나라의 첫인상을 결정한다. 굳이 사람 사는 도시며 마을까지 상륙을 나가지 않더라도 항구만 봐도 그 나라의 품격과 사정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항구에 물건이 가득 쌓여 있고 배와 차가 바삐 오가는 곳은 경제가 활발히 커나가는 나라이고 반대는 죽어가는 곳일 게 분명하다. 사람도 마찬가지, 한 마디 한 마디 여유가 있고 일처리도 분명한 곳이 있는가 하면 이곳에서처럼 짜증 섞인 태도로 남을 비난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만난 도선사 한 명이 아카바 사람 전체를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여기서 아카바의 한 단면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적을 뿐이다.


2018. 6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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