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상

알 수 없는 인생

바다

by 김성호

떠나기 며칠 전 선장이 나를 불러 메인컴퓨터 앞에 앉혔다. 그는 모니터에 실항사 인사평가 창을 띄우고는 항목 하나하나를 직접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 역량을 평가하는 거의 모든 항목에 excellent 등급을 매기고서 remark란에 입사를 강력하게 추천한다는 코멘트를 달았다. 그리고는 일항사를 호출해 따로 연계추천서를 작성하도록 하였고, 직접 회사에 연락해 나를 채용할 것을 요청하였다. 전화를 받은 담당자는 채용여부를 확답할 수는 없지만 지금껏 선장이 이렇게까지 강력하게 입사를 추천한 사례가 없었다며 염두에 두겠다고 답했다.

일항사는 선장의 지시에 따라 연계추천서를 작성했다. 추천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겼다.

실항사 상기 김성호는 승선 후 지난 8개월 간 3항사 업무 수행을 위한 학습은 물론 선상생활 전반에 열정적인 자세로 임했습니다. 또한 사관 및 부원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여 선상생활에 무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본 일항사는 전 사관의 체계적이고 엄격한 지도 아래 상기 실항사가 바로 3항사 업무에 투입되어도 될 만한 실력을 갖추었음을 보증하며, 향후 사관으로서 업무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합니다. 이에 본사 연계취업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의외였다. 나는 이제껏 선장이 직접 인사평가를 하는 걸 본 일이 없었다. 지난 8개월 동안 거쳐간 모든 사관의 평가는 일항사가 대행했다. 실제 그는 인사평가 폼이 어색한지 몇차례나 입력하다 틀리고 다시 입력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런 그가 굳이 나를 불러앉혀 내 앞에서 좋은 평가를 내준 이유가 무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더구나 난 좋은 실항사도 아니다. 그가 평가서를 작성하는 동안 나는 이 사실을 더욱 생생하게 깨달았다. 선장이 입력한 수십개의 excellent 가운데 내게 어울리는 건 아무리 후하게 쳐도 채 다섯이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마음가짐과 관련한 항목을 빼면 나머지도 대부분 poor 등급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나를 벌주기 위해서라면 아주 좋은 방법이야 하고 생각했으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한참이 걸려 평가를 모두 마친 그가 나를 돌아보며 특유의 호탕한 척 하는 웃음을 웃었다. 그러고서 난 이런 사람이야 라고 했었던가. 그 뿌듯한 표정을 대하고서 나는 차마 마주 웃어주기도 뭐한 기분이 되었다. 불과 이틀 전 깊은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나는 또 한 번 하선을 고민했었다. 만취한 네가 또다시 죄없는 누구를 쥐잡듯 잡아대는 걸 무력하게 지켜보면서, 지금 이 순간 네 턱주가리를 갈겨버리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를 속으로 상상했었다.

그러고보면 참 알 수 없는 게 세상 일이다. 몇 주 전까지 연계취업을 포기하고 있던 나는 그 덕분에 새로이 희망을 얻었다. 목표했던 바다 가운데 북태평양과 북대서양 칠레남단과 파나마, 카리브해를 가지 못한 상태니 최소 배를 일 년은 더 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 배를 내리면 당장 다음이 막막한 게 현실이었다. 그런데 내가 경멸하고 가끔은 저주했던 인간 덕분에 다음을 생각할 수 있게 되다니! 그렇다고 내가 그에게 고마워해야 하는가?

물론 선장의 추천이 연계취업으로 연결되리란 보장은 없다. 이 회사가 연수원생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내 지난 이력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잘 알고 있어 기대도 크지는 않다. 하지만 배를 타기 전 목표했던 선장님 추천서를 이런 식으로나마 받아드니 뭔가 오묘한 기분이 되었다.

정말이지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 재미진 것이다. 벼락맞은 오동나무가 귀한 줄을 걸듯이.


2018. 10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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