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상

수첩을 잃었다

바다

by 김성호

사라졌다. 선장님 호출을 받고 급히 자리를 비운 몇 분 동안에 벌어진 일. 배 위에서 가장 귀한 것이었고 그래서 몸을 떠난 일이 없었던 수첩이 보이지 않는다. 브릿지 뒤편 테이블에 잠시 놓아두고 돌아온 사이 뜯어진 수첩을 집어놓았던 집게만 덩그러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 그게 어떤 것인가. 지난 몇 개월의 기록, 미처 옮기지 못한 글과 생각이 고스란히.

잠시만 들춰보아도 내 것인지 알텐데 누구도 말이 없다. 잠깐이라도 그 앞을 지났을 법한 이들을 죄다 찾아다니며 아무렇지 않은 듯, 중요한 게 아닌 듯, 지나가듯이 묻는다. “거기 수첩 깜빡하고 놓아뒀는데 혹시 못 보셨나요? 크기는 이만하고...” 부질없는 일이다. 짐작가는 곳이 없는 건 아니지만 따져 물을 수도 없다. 나는 실습생이고 수첩엔 배에선 환영받지 못할 것들이 적혀있으니.

늦은 밤 가라지락커 안에서 문을 닫는다. 부디 쓰레기통이길, 쓰레기통이길, 바다는 안 된다, 바다는 안 된다고 되뇌면서. 썩은 내 나는 검은 봉투를 헤집으며 그날의 쓰레기를 찾는다. 바닥에 깐 박스 위에 쓰레기를 털어놓고, 이내 실망하고, 다시 쓸어 담고, 그 다음 봉지를 들어 털어놓는 작업을 거듭한다. 그렇게 한참을, 수십 번을 반복한 끝에 드디어 찾는다. 찢겨진 수첩, 조각난 종이, 젖어 번진 글씨들. 음식물 찌꺼기로 범벅된 종이쪼가리들을 황급히 모아든다. 어쩌면 너희 중 몇은 되살릴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고. 이 꼴을 하고서도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다.

선실로 돌아와 한참을 맞춰보니 짝이 맞지 않는 쪼가리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찾은 종이도 절반이 되지 않는 모양. 구역질나는 냄새를 풍기는 종이를 고이 모아 냉동고에 넣는다. 번지고 구겨져 엉망된 종이가 살아나길 기대하면서.

안도와 분노가 형편없는 칵테일처럼 뒤섞인 몸을 이끌고 상갑판으로 나선다. 깊은 밤, 바람 거센 북해, 하늘엔 큼지막한 달이 누렇게 떴다. 수천 걸음을 걸어도 누그러지지 않는 감정을 오늘 밤엔 또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걷고 또 걸을 뿐.


2018. 10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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