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수첩을 잃어버리고, 거기 적힌 대부분을 정말로 잃어버렸다는 걸 받아들인 뒤, 나는 한없이 무기력해졌다. 이러면 안 된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잡으려 했지만 몸과 마음이 완전히 따로 노는 걸 어찌하지 못했다. 펜을 쥐고 책상에 앉으면 울화통이 터지고 짜증만 치솟아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20킬로미터쯤 달린 마라토너를 붙잡고 기록이 잘못됐으니 다시 처음부터 뛰라고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몇 날 며칠 대리운전을 한 끝에 겨우 다음학기 등록금을 마련했는데 마지막날 외제차를 살짝 긁어 모은 돈 전부를 수리비로 내줘야 한다거나, 그런 좆같은 경우 말이다. 뭐가 됐든 내 상황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무슨 대단한 걸작을 도둑맞은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이 정도는 역경도 아니라고 남자답게 다시 한 번 해보자고 수십 번도 넘게 결심했으나 한 번 꺾인 의지는 마음처럼 쉽게 살아나지 않았다.
글을 쓰지 않으니 배 생활은 오히려 편했다. 때 되면 밥을 먹고, 하루 여섯 시간을 자고, 네 시간 짜리 당직을 두 번 올라가고, 이런저런 시키는 일을 하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음악을 들었다.
침대 맞은편 벽에 블루투스 스피커를 걸어놓고 태블릿PC로 음악을 재생시킨 뒤, 이불 속에 파묻혀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상상을 했다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다가를 끊임없이 반복하였다. 한참을 그러다보면 어김없이 무언가를 해야 할 시간이 왔다.
칠팔백곡 되는 노래가 물리기 시작하자 뭔가 다른 걸 하고 싶었다. 쉬는 시간이면 다른 선원들은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선식에서 올려준 이런저런 영상물을 보는 게 일이었다. 나도 그런 거나 해볼까 했는데 술은 지긋지긋하고, 도박판엔 낄 돈이 없고, 노래방에선 도박판이 벌어졌고, 할 만한 게임은 따로 들고 타질 않아서 영상을 볼 밖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한 달 좀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선식에서 올려준 외장하드를 뒤져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 야동과 스포츠경기 따위를 되는대로 틀어놓고 보았다. 월드컵은 배에 올라온 모든 경기, 그러니까 조별예선부터 16강까지를 모두 봤는데 몇 경기를 빼곤 보지 않는 것만 못했다. 드라마도 열편쯤 봤는데 흥미진진한 것부터 형편없는 것까지 종류가 다양했으나 보고나면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것들이었다. 야동이야 언제나 쓰잘데기 없는 것이지만 선식 담당자의 취향이란 도저히 존중하기 어려운 것으로써 몇개쯤 보다가 그만둘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나마 유익했던 건 <하트시그널>이란 짝짓기 예능프로였다. 보고 있자면 아니 시발 밖에서 예쁜 아가씨들이나 만나고 다닐 걸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제 발로 여기까지 찾아왔나 하는 깊은 빡침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뭐든 계속 보고 있자니 내가 배를 왜 타고 있는지 가물가물할 정도가 되었다. 글을 쓸 때는 그렇게나 부족하던 시간이 남아 돌았고 방으로 돌아오면 다시 침대에 누워 아무거나 틀어놓고 아무거나 하기 바빴다. 그러다 지치면 핸드폰을 켜고 위성인터넷을 잡아 인스타그램에 올릴 이런 저런 잡글을 끄적이고는, 다음주부턴 다시 글을 쓰자고 다짐했다가, 아무런 영상이나 틀어놓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도 빨리가던 시간이 어찌나 더디게 흐르는지, 마음만 한없이 조급하였다.
2018. 10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