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상

내가 원하는 건 강인함뿐

바다

by 김성호

실습항해사는 서러운 이름이다.

해운회사에 고용된 선박직원이 아니라 교육기관 소속인 실습생 신분으로, 짧게는 6개월 길게는 9개월 동안 최저시급에 한참 못미치는 대가를 받고 상선을 타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다. 3급 항해사 면허를 받기 위해 이를 감수하는 것인데, 이 기간 동안 해운회사는 실습생에게 한 달 평균 본선불 300불을 지급한다. 각종 수당이며 명절선물 지급대상에선 당연히 배제된다. 실항사가 노동을 하는 선박직원이 아니라 실습을 하는 실습생 신분이라는 이유에서다.

물론 현실에선 대부분의 실항사가 노동을 한다. 선박이 보유한 인력이 부족하기도 하거니와 실습생을 운용하는 사관들이 실항사의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저들도 실습기간을 거쳐 사관이 된 데다, 대부분의 실항사가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일을 하고 있으니 그래도 괜찮지 않냐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군 특례가 걸려 있는 해양대학 실습생이나 어디까지나 이류일 수밖에 없는 연수원 실습생이 통념에 저항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주어진 일이 실습이 아니라 노동이 아니냐며 거부했다가는 단박에 불량한 실항사로 찍히기 십상이다. 실습이란 게 배운 것을 실제 업무에 활용해가며 익히는 것인데 실습과 노동을 구분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인 것도 물론이다.

분명한 건 실항사가 최저임금도 지급받지 못한 채 부당한 노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육상에서 운용되는 각종 실습제도와 비교하면 이해가 편한데,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산업현장에 파견되는 실습생의 경우 기업체가 실습생에게 직원과 같은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면 최저임금 이상의 실습비를 지급해야만 한다. 근로기준법이 정하고 있는 시간을 넘겨 업무를 수행하도록 요구할 수도 없다.

반면 실항사는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면서 실습시간은 육상 실습생에 비해 훨씬 더 길다. 관련된 법령에서 보는 실습과 노동의 차이란 간명해서 실습생이 하지 않으면 직원이 수행해야 하는 업무가 노동에 해당하는데, 그렇다면 배에서 실항사가 수행하는 거의 모든 행위가 노동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 배의 경우만 해도 회사 절차서에 이항사 업무로 나와 있는 소개정 업무와 삼항사의 업무로 명시된 입출항 서류업무, 화물당직과 기타 잡일들을 마치 처음부터 실항사의 역할인 것처럼 맡기고 있지 않던가.

실항사의 입장에서도 배의 일원으로 보탬이 되고 싶은 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정당한 대가를 받고 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는 구별돼야 마땅하다. 가끔 어떤 사관들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선지 정말 궁금해서인지 요즘 생각하는 문제를 말해보라 하면 나는 이런 이야기를 꺼내곤 하였다. 그러면 십중팔구는 마치 마름이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일으키려는 노비를 눈앞에 두었을 때나 할 법한 반응을 보이는데, 이를 보고 있자면 흥미롭기가 그지없다. 실항사는 인간이 아니라는 말부터 여기가 원래 부조리한 곳인지 모르고 왔느냐는 말, 세상은 본래 부당한 것이라는 말, 공짜로 밥 주고 먹여주는데 당연히 일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 내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빡셌다는 말, 일을 배우는데 돈까지 벌려고 하는 건 욕심이 아니냐는 말까지 온갖 흔해빠진 말들이 쏟아지는 것이다.

재미있는 건 지난 9개월 여 동안 내가 저들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는데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저 저들이 속 이야기를 해 달라고 청하니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인데, 할 때마다 반응이 재미있어 그만두기가 쉽지 않다.

한 사회의 성숙도는 가장 힘없고 열악한 상황에 처한 이를 대하는 모습에서 드러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한국의 해운업계는 과연 얼마만큼 성숙한가.

말이 길어졌다. 부당함을 견뎌내는 강인함과 부당함이 부당함인 줄도 모르는 어리석음을 구분하자는 뜻이다. 물론 내가 원하는 건 강인함뿐이다.


2018. 10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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