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상

연수원 실항사를 취급하는 법

바다

by 김성호

실습이 끝났다. 보다 정확히는 9개월의 실습기간이 종료됐다. 이제 하선해 항만청에서 3급 항해사 면장을 발급받을 수 있게 됐다. 뿌듯한 일이다.

하지만 변한 건 없다. 나는 여전히 바다 위, 선사에선 하선과 관련해 아무런 말이 없다. 한국까지 가기 전 들르는 항구가 여럿이지만 이대로라면 한국에서 하선할 것이란 불안감이 엄습한다.

한국은 일러야 10월 중순 도착이다. 일정에 변화가 없이 간다 해도 최소한 한 달은 더 배를 타야 한다는 뜻이다. 한 달 더 탄대도 연계취업 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렇다고 회사에 직접 불만을 제기하자니, 밉보여 배를 더 타지 못할까 걱정이다. 아직 북미와 남미, 카리브해와 파나마운하, 북태평양과 칠레남단을 도는 항로를 가지 못했다. 이 회사가 아니라면 월드와이드 부정기선을 탈 기회는 영영 없을지 모른다.

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있지는 못하겠다. 계속 밟히다보면 밟는 쪽도 밟히는 쪽도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법이니까. 새로 바뀐 선장님을 찾아 사정을 설명하니 바로 회사에 메일 한 통을 써준다. 실습기간이 종료하고 들어가는 첫 항구에서 하선이 가능한지를 묻는 내용이다.

회사는 다음날이 다 가도록 답이 없다. 통상적인 문의라면 진즉에 답이 왔을 시간, 답하기 곤란하거나 답할 가치가 없다는 뜻일 테다. 선장이 직접 전화를 넣고서야 하선이 어렵다는 답이 돌아온다. 비용절감 차원에서 전 선원은 한국항 교대가 원칙이란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실항사가 선사 소속의 선박직원이 아니란 점이다. 실습기간이 종료되면 어디서나 하선할 수 있고, 선사엔 이를 잡아둘 권한이 없다는 뜻이다. 선박직원이 아니란 이유로 온갖 혜택에서 배제할 땐 언제고 이제와서 하선을 막는 태도가 이중적으로 느껴진다.

선사가 실항사의 외지하선을 꺼리는 이유야 빤하다. 실항사의 복귀에 들어가는 비용을 선사가 떠맡는다는 실습계약조항이 범인이다. 얼핏보면 실항사를 위한 조항인 듯 싶지만, 어디까지나 선사가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의지가 있을 때의 이야기다. 실항사가 하선한다면 한국까지 가는 교통편은 물론이고 수속비와 대리점에 들어가는 비용이 발생하는데, 실항사를 말 못하는 공짜 노동력 취급하는 선사가 이를 기꺼이 부담할 리가 만무하다. 계약 당시부터 이 조항이 께름칙했는데 결국 이런 꼴을 당하는구나 싶어 마음이 갑갑해진다. 정리하자면 내가 지난 아홉 달 동안 몸담은 이 선사는 비행기값과 수속비용이 아까워 나를 한 달이나 더 잡아두고 부리려 한다는 말이다. 내게 어떠한 통보도, 단 한 마디 설명도 없이.

나로선 상식을 벗어난 일처리다. 유럽이나 수에즈, 소하르, 하다못해 싱가포르에서 내려주는 게 가능함에도 한국까지 의무에도 없는 공짜노동을 한 달 넘게 더 하라는 게 아닌가. 배에서 내려 매일 한 편씩 글만 써 팔아도 비행기값은 충분히 뽑을텐데 하는 생각이 하루 종일 맴돈다. 물론 돈은 내가 낼테니 내려달라고 했다가는 정신나간 실항사로 찍힐 게 분명한 노릇이니 입은 다물 수밖에.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격으로, 브레머하벤에 정박한 같은 선대 소속 배에서 해대 실항사와 실기사가 한꺼번에 하선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 배 선장도 이곳에서 교대했으니 외지교대가 안 된다는 말은 연수원 실항사에게 쓸 돈이 없다는 뜻,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곳의 룰은 이렇게나 다르다. 계약만료로 일 시킬 권한이 없는 파견 실습생을 먼저 내려줘야 한다는 건 내 생각일 뿐, 이곳에선 늘 강자가 우선이다. 입김이 세고 업계에 아는 사람이 많은 시니어 사관을 의지에 반해 잡아두는 건 부담이 되는 일이지만 실항사야 얼마든지 잡아둬도 뒷탈이 없다는 식이다. 해대에서 관리하는 실습생보다는 연수원생이 만만한 것도 물론이다.

사실 이건 완전히 어리석은 판단이다. 해양수산부 산하기관 소속으로 고용노동부 지원을 받는 교육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실습생에게 이런 취급을 하는 게 어떤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지 선사에선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는 듯하다. 물론 내가 여기서 배를 더 타고자 하는 한,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려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화는 나지만 별 수 없는 일이다. 궁한 것도 나고, 제 발로 배에 오른 것도 나니까.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를 수밖에. 로마에 있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2018. 10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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