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글로비스 크리스탈 호와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길이 199.98m, 넓이 32.26m, 높이 46m에 열두 개 데크를 가진 자동차운반선이 집처럼 느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역경이 있었던지, 돌이켜 생각하는 것조차 마음 한켠이 불편하구나.
크리스탈 호와의 첫 만남이 아직도 생생하다. 광양항 자동차전용부두에 묶여 스턴램프를 내리는 배가 어찌나 크게 느껴졌는지 램프에 올라 타수와 인사를 나눌 때까지도 나는 모든 게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일단 배에 올라타면 아홉 달 동안은 내릴 수 없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는데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어놓으며 이제는 되돌릴 수 없노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었다.
배에서 만난 모든 건 낯설고 불친절했다. 그곳에서 열 달이나 버텨낸 내가 대견하고 안쓰러워서 꼭 한 번은 내가 아닌 누가 되어 마음 다해 안아주고 싶었지. 도대체 무얼 위해 배를 탔는지, 무엇을 얻으려 했고 무얼 얻어 돌아왔는지, 그런 건 모두 나중으로 미뤄버리고.
이제야 말하지만 내가 유독 이 배를 타기 싫어했던 건 선명 때문이었다. 하고많은 이름 중에 크리스탈이라니! 건배 한 번 세게 하면 박살나는 게 크리스탈잔인데 무엇하러 배 이름을 크리스탈로 지어놓았는지 나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이 크리스탈에서 Y와 S를 떼어놓으면 울음을 뜻하는 CRY와 별에서 마지막 철자 하나만 바꿔놓은 STAL로 갈라지는데, 나는 이것도 못내 못마땅했다. 내 이름자를 간략히 풀이하자면 여름날 한낮에 뜬 별이 되는데, 별이 울고 있다니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 없는 이름이 아닌가. <삼국지연의>에서 와룡 제갈량과 쌍벽을 이루는 재능으로 불린 봉추 방통도 낙봉파를 지나다 죽었고 말이다.
불안은 현실이 되어 크리스탈 호에서의 시간은 내겐 몹시 버겁고 괴로운 것이었다. 하루하루 삶이 무너져내렸고, 소중한 것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모래알 같이 쥐고 있으려야 쥐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난 고난은 지나간 고난일 뿐, 여기서 더 말해 무엇하겠나.
시간의 여신은 언제나 불행한 자의 편이다. 어찌 되었든 시간은 흘러 나는 도착해야 하는 항구에 도착하였다. 예상보다 훨씬 긴 항해였고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쳤다. 이제는 충분히 쉬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돌이켜보면 너도 나만큼 고생했구나 싶다. 수많은 실패 가운데 배운 게 있다면 해야 할 말은 해야 할 때 해야 한다는 것. 너에게 마음 다해 감사한다. 부디 나의 마음이 전해지기를. 크리스탈이여, 오래도록 안녕하여라!
2018. 11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