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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상

서른넷에 백수가 됐다

단상

by 김성호

백수가 됐다. 매일 아침 정해진 일터가 없는 거야 어제나 오늘이나 매양 한가지지만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백수다. 어제까진 기다리는 소식이 있었지만 오늘부턴 없기 때문이다. 바다는 흘러갔고 오늘은 일이 없는데 다음은 무엇을 할까. 삶이란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 재미진 것이다.


지마린에선 연수원생 채용이 보류됐다고 했다. 보류라니, 그들다운 말이다. 양 해대에선 수십 명씩 신규채용을 해놓고서 연수원생 채용은 한 명도 할 수 없단다. 뽑힌 해대생 태반은 타 선사에서 실습한 인원이라니, 중요한 건 출신이지 다른 무엇도 아니다.


지난 고생을 채용으로 보답하길 바란 건 아니었다. 최소한의 예의만 지켜주길 바랐다. 겨우 들을 수 있었던 보류 같은 말도, 남의 입에서 전해 듣는 보잘것없는 제안도 아닌 솔직하고 직접적인 입장 말이다.


그러나 이젠 약간의 기대조차 없다. 뽑을 듯 뽑을 듯 시간만 질질 끈 저들 덕분에 난 석 달 가까운 시간을 허비했다. 은혜를 잊으면 원한이 된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아침에 전화를 걸어온 연수원 교수는 지마린 관계자에게 연안벌크를 반 년 정도 타고 오면 월드와이드 자동차선으로 옮겨주겠다는 말을 들었다며 연안벌크 승선을 권했다. 하지만 본디 약속은 신의가 있는 자와 하는 법이다.


결국 나는 나이 서른넷에 백수가 됐다. 통장은 바닥을 보이는데 허술한 글을 팔아 겨우 용돈 벌이를 한다. 하지만 팔이 잘린 칼잡이나 절름발이가 된 발레리나, 아내를 잃어버린 남편이 제게 남은 삶을 멋지게 살아내던 이야기를 나는 울면서 보았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큰 아픔들에 비하면 나의 고민이란 언제나 지극히 사소하다.


다행히 나는 몇 가지 재주를 가졌고, 그것에 쓰임이 있다는 걸 안다. 나를 알고 나아갈 길을 알며 앞으로 걸으려는 의지도 있으니, 정말 중요한 건 대부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엔 화도 났으나 충분히 자고 일어나니 차라리 잘 되었다 싶다. 육지엔 할 일이 많고 사귈 만한 사람도 많다. 세상에 훌륭한 여자도 오직 한 명 뿐은 아닐 테니,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오듯 아무렇지 않은 날이 있을 것이다. 더는 지나간 것에 연연하여 스스로를 괴롭히고 싶지 않다. 모든 일이 마음처럼 되기야 하겠냐마는 내 마음이라도 마음대로 먹어보려 한다.


거듭 밀려오는 파도와 파도 사이에서 떠오르던 크고 둥근 고래의 등짝을, 끝도 없이 이어진 수평선과 그 너머로 잠겨드는 붉음을 나는 보았다. 누구도 제 값을 치르지 않았으나, 나는 지난 이년의 값을 그것으로 받아간다.



2019. 1. 9. 수요일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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