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이란 반다르압바스에 입항한 일이 있었다. 우리 배가 들어간 30여개 항구 가운데 가장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그 넓은 항만이 물건으로 가득했다. 트럭이 쉴새 없이 오갔고 사람들은 활기찼다. 미국이 핵협정에 사인하고 지독하고 치졸했던 경제제재를 푼지 딱 3년째였다.
사우디는 좆같은 나라다. 좆같다는 건 진짜 좆같다는 뜻이다. 할 줄 아는 건 약탈밖에 없던 베두인놈들이 기름짜서 번 돈으로 물 건너온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린다. 노동법도 최저임금도 지켜지지 않는다. 최하급 노동자의 삶은 지옥이 따로 없다. 사우디는 나랏일도 그따위로 한다.
중동의 맹주가 되겠다는 미친 신앙은 말 그대로 미친 신앙이다. 사우드 왕가가 메카와 메디나를 점령하고 있을 뿐, 전통도 무엇도 없기 때문이다. 현금은 넘친다지만 내정은 개판이고 이렇다 할 산업도 없다.
그런 사우디놈들이 이란과 터키를 견제할 방법은 공작 뿐이다. 경제제재가 풀린 이란이 사우디를 넘어서 궁극에는 커다란 위협이 될 게 분명한 일이니.
미국이 이란과 핵협정을 맺자 사우디는 미국에게 달려들었다. 채권을 다 풀겠다며 말 그대로 개겼다. 오냐오냐 키운 개가 주인을 문 꼴이었다. 미국은 뒤통수 한 대 갈겨주고 갈 길을 갔다.
사우디의 방식은 치졸하다. 알카에다와 ISIS의 돈줄인 건 유명한 얘기다. 지독한 예멘 공습과 곳곳에서 이어진 잔혹행위, 절정은 영사관에서 터키 기자 목을 자른 일이었던가. 앞으론 그보다 더한 일도 있을 것이다.
권력은 공백을 허용치 않는다. 향후 중동에서 미국의 힘이 줄어들 건 분명한 사실이다. 트럼프가 그걸 앞당길 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결국 앞당기거나 조금 늦추거나 둘 중 하나다.
미국이 빠질 자리를 넘보는 건 러시아다. 시리아에서 미군과 러시아군이 육탄전을 벌인 건 그래서 상징적이다. 러시아는 후퇴할 수 없고 미국은 후퇴하고 싶어질 것이다. 둘 사이가 비등해지는 날 전쟁은 가까워진다. 우크라이나가 작살날 때 벌어진 일이 중동 어느 나라에서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 어쩌면 유럽에서도.
미국 이후의 파트너를 기다리는 사우디에겐 러시아가 매력적이다. 터키 역시 러시아와 물밑 합의가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란은 또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나.
물론 우리는 기름만 사오면 된다. 바닷물로 에너지를 만드는 기적의 기술을 이루지 못한다면 싱글 직장인이 임대아파트 알아보듯 중동산 기름에 매달려야 한다. 그러자면 그냥 TV뉴스나 보면 되는 것이다. 멍청해지는 게 맘 편한 길이므로.
예멘을 까부수는 사우디와 시리아내전을 불붙이는 러시아, 뒤로 빠져 돈만 세는 미국 저 편에서 우리는 계속 페르시아만 기름을 태워 수출강국으로 군림할 것이다. 나 역시 그 안에서 잘 먹고 잘 살 것이다.
반다르압바스의 봄은 짧았다.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쉽게 담담해지지 않는다. 길어야 5년이라 보았는데 꼭 5년이었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선 경복궁역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과테말라 안티구아 원두커피를 마시는 것조차 죄악이 된다. 이쯤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세계화란 공범이 되는 것이란 걸.
2020. 1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