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세상은 원래 거지같다. 선과 정의를 부르짖는 놈들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처음부터 그랬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악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을 선과 의로움으로 덮는 것이다.
처음엔 선했던 세상을 악이 오염시킨다고 보느냐, 본래 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선으로 바꿔나간다고 보느냐. 이 인식 차이가 아주 많은 것을 달라지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탄 배가 독일 함부르크에 들어갔을 때 일이다. 컨테이너부두 쪽에서 문제가 생겨 난리가 났었다. 항만에 경찰이 출동해 이것저것 조사하고 다녔는데 무슨 일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바삐 짐을 챙겨 항만을 빠져나갔다.
함부르크는 내가 가 본 도시 중 손꼽히게 아름다운 곳이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맑았으며 밝기까지 했다. 거리는 자연스러웠고 건물들은 그대로 도시에 녹아들었다. 도시를 가르는 엘베강 양안에는 여러 산업시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건강한 시민들이 자부심을 가질 만한 것이었다. 정당한 노동으로 쌓아올린 풍요로운 도시, 자랑스런 역사를 가졌고 강건한 민주주의가 자리한 보기 드문 땅이었다.
이 도시에서 며칠을 머물다 출항일이 가까워져 배로 돌아왔다. 엘베강을 따라 나오는 길에 햇볕이 드는 언덕을 따라 자리잡은 호화로운 주택들을 보았다. 자유 한자도시 함부르크,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이었다. 마치 요정들이 모여 사는 곳처럼 아름다웠다. 갑판에 나가 여러 장 사진을 찍었다.
며칠 후였다. 지중해 한복판에서 뉴스 한 토막을 접했다. 항구를 나서며 보았던 경찰들이 무엇 때문에 출동했는지를 알리는 뉴스였다. 함부르크발 기사엔 항만에서 컨테이너 하나가 발견됐는데 그 안에 국적을 알 수 없는 여자아이들이 수백명 실려 있었다는 내용이 짤막하게 담겨있었다.
다른 많은 컨테이너가 그렇듯, 그 아이들에게도 함부르크 항만이 최종기착지였을 것이다. 손꼽히는 항만보안을 감내하며 이곳에 들어온 컨테이너가 모두 그렇듯이. 제 목적지도, 제가 이곳에 온 이유도 알지 못하는 이 아이들이 함부르크 사람들에게 소비될 것이었다.
일주일 머물며 본 이 아름다운 도시 이면에는 얼마나 많은 아름답지 않은 것들이 자리하고 있었을까. 대체 얼마나 많은 컨테이너가 법망에 걸리지 않고 항만을 빠져나간 것일까.
n번방 사태가 소화되는 과정은 내게 역겨운 기분을 들게 한다. 조주빈이란 인간에 대한 수많은 보도들과 텔레그램방에 들어갔다는 23만명의 신상을 까발리자는 이야기,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이 문제를 제1현안으로 삼는 일부 정당의 태도 따위가 그렇다. 그런 보도와 주장들 밑에 깔린 인식과 의도만큼 나를 불쾌하게 하는 것도 많지 않다.
대체 누가 n번방을 만들었을까. 조주빈과 23만명의 악당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너희 선량한 사람들을 위협한 것일까.
국회 기자회견장을 찾아 n번방 관련자를 처벌하자며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수많은 인간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이 사태에 가진 지분이 얼마만큼인지를 생각한다. 성인영화를 규제하고, 성매매를 규제하고, 야동을 규제하고, 다시 뭘 규제했다가 또 다른 무엇을 규제하고, 그래서 이 땅에 모든 성산업과 관련된 것들을 뿌리 뽑겠다는 이 무지한 인간들은 정말 n번방 사태에 책임이 없는 걸까.
어둡고 눅눅한 곳에서 곰팡이가 피지 않기를 바라는 건 얼마나 뻔뻔한 일인가. 유사 이래 한 번도 사라진 적 없는 성산업을 모조리 범죄의 영역으로 내몬 인간들은 저들 자신이 만든 비극이 어떤 것인지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금주령은 미국의 주류산업을 망쳤을 뿐 아니라 당대 미국의 정신마저 망쳤다. 밀수된 쓰레기 술은 사람들의 건강을 해쳤다. 꽤 많은 사람들이 부적격 알코올을 마시고 골로 갔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병신이 됐다. 밀주 유통을 장악한 마피아는 법과 치안권력 위에 군림했다. 미국 건국 이래 꾸준히 발전하던 양조사업은 패가망신했다. 그래서 미국은 아직도 싸구려 맥주랑 버번위스키를 만든다. 금주령을 주도한 페미니스트년들은 어떤 책임을 졌을까. 다른 많은 문제에서 그랬듯 뒤로 빠져 모른 척 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 우리 곁에 23만명의 쓰레기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여겨선 안 된다. 그들만 몰아내면 이런 일이 사라질 것처럼 여겨도 안 된다.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을 의로움으로 덮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선한 세상을 악마가 오염시켰다’는 편한 시각에서 벗어나 진짜 해답을 구하는 것이다.
2020. 4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