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칼럼

이명주와 레미 본야스키

이명주 월드컵 엔트리 탈락에 부쳐

by 김성호

레미 본야스키라는 격투가를 아는가? 일본에서 주최하는 입식 종합격투기 대회 K-1 월드GP에서 2003년과 2004년 2연속 우승을 차지했던 유명한 선수다. 트레이드 마크인 플라잉 니킥으로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던 선수로 필자 역시 그의 팬이었는데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K-1 월드 GP의 결승전을 본 뒤부터였다.

3분 3라운드로 펼쳐지는 결승전에서 레미 본야스키의 상대는 무사시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격투가 모리 아키오였다. 3라운드의 경기가 펼쳐지는 동안 레미 본야스키는 무사시에게 우위를 점했으나 결국 KO시키지 못했고 판정에서 심판들은 레미와 무사시에게 같은 점수를 주었다. 팬들은 술렁였지만 경기는 연장에 돌입했고 레미 본야스키와 무사시는 4라운드째 경기를 펼쳤다.


이 라운드에서 레미 본야스키는 무사시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였고 무사시는 단 2번의 킥만 날렸을 뿐 이렇다 할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렇게 3분이 흘렀고 경기는 누가 보아도 레미 본야스키의 승리였으나 판정결과는 이번에도 무승부였다. 그리고 이어진 연장 5라운드에서 레미 본야스키는 무사시를 압도하고 마침내 우승을 했다.


경기가 끝나고 이어진 인터뷰에서 레미 본야스키가 한 말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인정할 수 없는 억울한 상황에 계속해서 처하게 되면 두 가지 성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이런 더러운 것 같으니 하고 포기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더 큰 차이를 벌려 결국 자신의 승리를 모두가 인정하게 하는 사람이다. 내가 오늘 이긴 것은 내가 후자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난 8일 이례적으로 예비명단도 없이 발표된 23명의 2014 브라질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이명주의 이름은 없었다. 지난 경기까지 9경기 연속 공격포인트(4골 7도움)를 기록하며 절정에 오른 기량을 보여주었지만 끝끝내 홍명보 감독의 부름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9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는 마니치(1997년·당시 부산·6골 5도움), 까보레(2007년·당시 경남·7골 5도움), 에닝요(2008년·당시 대구·8골 4도움), 이근호(2013년·상주·9골 4도움)에 이은 K리그 사상 5번째 대기록이다.


리그에서의 맹활약에도 국가대표팀에서 충분한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 선수들을 축구팬이라면 몇 명 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2009, 2010년의 김영후와 유병수가 그랬고 2012년 이후의 이동국도 마찬가지였다. 황선홍, 최용수, 김도훈, 우성용 등 기라성 같은 공격수들의 시대가 끝난 뒤 이동국을 제외하고는 오랫동안 대형 스트라이커가 나타나지 않던 한국축구계에서 2009년은 기록할 만한 해였다. 이동국이 전북에서 화려하게 부활했고 김영후와 유병수라는 걸출한 신인들이 한꺼번에 나타났으니까. 하지만 한국축구를 이끌어갈 후기지수로 주목받았던 김영후와 유병수는 남아공 월드컵 발탁이 무산된 후 오랜 부진에 빠져들었다. 국가대표팀 발탁이 유독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우리나라 축구계의 상황에서 리그에서의 맹활약에도 국가대표로 발탁되지 않는다는 건 동기부여를 잃게 하는 요인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번 대표팀 최종 엔트리 발표 이후 가장 논란이 된 선수는 역시 이명주였다. K리그는 물론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까지 만개한 기량을 한 껏 뽐내고 있는 그가 일본과 중국 등에서 평범한 활약을 하고 있는 선수들에 밀려 승선에 실패했다는 것, 이는 K리그와 대표팀에 애정을 가진 모두에게 그야말로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까지 보여진 홍명보 감독의 성향을 고려하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충격적으로 느껴질 만큼 최근 이명주의 활약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랬던 그가 대표팀 승선에 끝끝내 실패하자 2010년의 김영후와 유병수가 그러했듯 동기부여를 잃고 부진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도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명주에게 있어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10일 펼쳐진 포항과 전남의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12라운드에서 이명주는 1골 2도움을 기록하며 K리그 최초로 10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는 대기록을 쌓아올렸다.


팽팽한 흐름이 이어지던 전반 26분 상대 페널티지역 우측에서 왼발 땅볼슛으로 선제골을 기록한 이명주는 후반 강수일, 김승대의 연속골을 도우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이명주의 활약으로 포항은 만만치 않은 상대인 전남을 꺾고 인천과 비긴 2위 전북과의 승점차를 4점으로 벌렸다.


경기가 끝난 뒤 포항의 황선홍 감독은 이명주에 대해 "1골 2도움이라는 수치도 중요하지만 경기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달랐다. 끝까지 냉정했다. 이것이 팀 승리로 이어졌다"며 “대표팀의 문은 언제든 열려있다.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월드컵 출전이 불발되었음에도 상심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플레이를 펼친 제자에 대한 격려와 응원의 말이었다. 이명주를 바라보는 팬들의 마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한 경기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다. 어느 순간 이명주에게도 동기부여가 되지 않고 박탈감이 찾아오는 순간이 찾아올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황선홍 감독 및 포항의 코칭 스태프들이 사려깊게 그를 도울 것이며 K리그의 수많은 팬들 역시 그를 응원하리라는 사실이다. 월드컵은 4년마다 찾아온다. 4년이 흐른 뒤에 그가 또 어떤 활약을 하고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되는 이유이다.



2014. 5. 10. 토요일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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