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도시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사람 찾아 떠나는 여행
공산주의 체제의 자본주의 적응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공산주의의 비효율성이 한계에 도달한 1980년대, 공산주의 국가들은 오직 살아남기 위해 변화해야 했다. 1985년 당 서기장에 취임한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란 외침은 오래된 상처를 까뒤집으며 내지르는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공산권 맹주가 그러했으니 베트남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소련이 엉성한 개혁과 무대책의 열어젖힘으로 혼란에 놓인 동안 베트남은 베트남식 쇄신 도이머이를 감행한다. 파격적 변화나 무방비적 개문 대신 은근하지만 분명한 변화, 그것이 베트남식 쇄신으로 불리는 도이머이였다. 결국 소련은 패망했으나 베트남은 공고하니, 도이머이가 반세기쯤 지탱하게 한 선택이라 해도 완전히 틀리진 않을 것이다.
도이머이의 영향은 거의 전방위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관광만큼 극적 효과가 일어난 부문이 드물었다. 도이머이가 한창이던 1993년, 베트남은 국제관광을 전면 허용키로 결정한다. 반세기만에 문을, 그것도 아주 활짝 열어젖혔다. 항공노선이 늘어나고 낙후된 휴양지며 도로가 정비됐다. 버려지다시피 했던 북부도시 사파가 일어난 것도 그 즈음부터였다.
사파는 중국 국경지대 라오까이성의 소도시다. 판시판산 북쪽 자락의 평균 해발 1000미터가 넘는 고지대에 위치했다. 오랜 기간 베트남과 중국의 행정력이 닿지 않는 변방이었단 점은 도리어 이곳을 특색있게 만들었다. 오늘날 베트남에 병합된 54개 소수민족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흐멍과 자오족이 이 근방에 터를 잡은 것이다.
식량 떨어질 일 없는 베트남 킨족이 밀림이나 고지대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다. 사파가 베트남 역사에 들어온 건 북방에 군사기지를 확보해야 했던 프랑스의 개입 이후부터다. 프랑스는 응우옌 왕조의 대남국을 좀비화시켜가며 전토 측량에 착수하고 그러다 사파의 존재를 알게 된다. 사파가 북부 통킹지역을 위협하는 게릴라의 배후지가 될 가능성이 충분했으므로 프랑스는 아예 수비대까지 상주시킨다. 이후 시원하고 건조한 사파는 달랏과 함께 프랑스인의 베트남 내 휴양지로 개발된다. 오늘날 사파 시내를 지키는 멋스런 건물 상당수는 이때 지어진 것들이다.
사파는 두 차례 인도차이나 전쟁을 거치며 버려진 도시가 되었다. 프랑스가 물러난 뒤 베트민이 잠시 점령했다가는 전황이 유리하게 돌아가며 쓸모가 없어진 탓이다. 그러다 관광이 개방되며 다시 주목받기에 이르니 판시판산과 선선한 기후, 소수민족의 삶과 프랑스가 남긴 유산이 모두 자산이 되었다. 킨족에 병합된 사파의 소수민족들은 관광과 농업에 기대어 근근이 먹고 산다. 말이 관광이지 반쯤은 구걸에 가까운 것이고, 기초교육이나 도시로의 이탈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연간 조단위 매출을 기록하는 사파의 관광업은 고스란히 킨족 공산당과 썬그룹의 것이다. 제 목소리를 낼 만큼 많지도, 무시해도 될 만큼 적지도 않은 사파 소수민족의 현실은 역사도 문화도 좆도 모르는 나같은 뜨내기에겐 프랑스 식민시대 킨족의 삶 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도 더 참담하게 느껴진다.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