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린응사, 아니 영흥사라고 해야 하나. 어차피 같은 말이다. 린응사는 다낭에 있는 절이고 절보다는 관광지로 유명해졌다. 유명해진 건 다낭 특산물이라 해도 좋을 대리석으로 깎은 어마어마하게 큰 불상 때문이다. 다낭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보면 미케비치(My khe beach) 너른 해안을 굽어보는 해수관음상이 어디서나 눈에 띄어 관심을 끈다. 그래서인지 여행사진을 찍으려는 이들에겐 린응사가 랜드마크로 통하는 모양새다.
해수관음은 말 그대로 바다를 살피는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구제하려 부처에서 스스로 보살이 된 존재다. 고통 어린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비로 인도한다니 힘들고 어려운 이들에게 수호신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관세음보살의 가호를 바라는 이들은 어디에나 그 형상을 세웠다. 뱃일하는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장담할 수 없는 바다를 터전으로 삼다보니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더욱 간절한 건지도 모르겠다. 해수관음상이 관세음보살상의 한 장르로 자리잡은 이유다.
린응사 해수관음은 하품하생의 수인에 감로수 정병까지 들고 있어 존재감이 분명하다. 세상의 가장 못한 자까지도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대하겠다는 그에게 참회하지 못할 죄는 없다고 봐도 좋다. 오죽하면 거침없는 우리 원효대사가 세상 많은 부처 중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만 딱 골라서는 귀의하라고 외우고 다녔겠는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67미터짜리 해수관음상이 다낭에 선 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반세기 전 북베트남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승리한 뒤 남베트남 일대에선 탈출행렬이 줄을 이었다. 프랑스와 일본 식민지배에 협력한 이들, 공산주의 탄압에 압장선 이들, 사이공을 근거지로 남베트남을 지원한 화교들까지 사활을 걸고 탈출을 시도했다.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197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 간 남베트남에선 최대 400만 명이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고 알려졌다. 이들은 서로는 태국, 남으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북으로는 홍콩 등지로 탈출하여 서방세계로 망명하길 원했으나 나라까지 뺏긴 마당에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당장 가라앉아도 이상할 게 없는 배에 빼곡하게 실려 식수도 식량도 부족한 채로 망망대해를 떠돌았다. 구조되지 못하면 빠져죽거나 굶어죽거나 표류해 돌아올 운명이었지만 탈출은 끊이지 않았다. 패자에 대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탄압은 그토록 매서웠다.
바다로 나아가기 편한 다낭 미케비치는 보트피플의 주요 탈출로가 됐다.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생을 마감하는 곳이기도 했다. 미케비치 연안에서 사망한 보트피플은 어느 자료든 1만 명을 상회한다고 기록돼 있다.
비극은 베트남이 도이머이라 불리는 쇄신정책을 펼치면서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사상이 다른 이들에게 얼마간 숨쉴 자유를 주는 한편, 망명에 성공한 보트피플 즉 베트남계 서방 이주민과도 손을 잡기 시작한 거다. 린응사는 보트피플이 출자한 자본을 중심으로 2003년 설립됐다. 이곳에 베트남에서 가장 큰 해수관음상이 세워져 수많은 이가 숨진 미케비치를 내려다본다. 열여섯 관 중 가장 낮은 하품하생의 수인을 하고서 역사의 중죄인조차 구원하고 말겠다는 이 불상에 담긴 원념은 뜻을 읽을 줄 아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그가 들고 있는 마르지 않는 감로수 정병은 갈증으로 죽어간 이들에게 얼마나 간절했던 것이었나. 말하자면 세상에는 뒤늦게 도착하는 자비가 너무나도 많다. 나무관세음보살이다.
2022. 9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