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게재, <쓸 만한 인간> 서평
[김성호의 독서만세 142] 배우 박정민 '쓸 만한 인간'
에세이를 읽는다는 건 무엇일까. 갈수록 얄팍해지는 출판시장에서 그래도 팔리는 장르로 여겨지는 에세이는 대체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에세이를 읽는 건 사람을 읽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끄집어낸 글을 남에게 내보이기까지 작가가 거쳤을 과정이 만만찮을 것이므로, 그 정제된 고민과 정서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글쓴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과 사람, 이해와 가치관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때로는 감탄하게 되고, 때로는 공감하게 하며, 때로는 위로를 던지는 에세이를 읽는다는 건 즐겁고 감동적인 일이다.
누군가가 쓴 글을 읽는 건 카페에서 마주 앉아 한두 시간의 한담을 나누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상을 안긴다. 때로는 한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하게끔 하고, 그로부터 나를 되돌아보게도 한다. 진실한 에세이는 그래서 유익하다.
이번에 읽은 에세이는 <쓸 만한 인간>이다. 2016년 첫 출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팔리고 있는 이른바 스테디셀러다. 한국 에세이 시장에선 제법 성공한 책 중 하나로 꼽힌다.
배우 박정민, 그 청춘의 기록
글쓴이는 박정민이다. 대한민국 박정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된 배우 박정민이 저자다. 책은 그가 아직 충분히 유명해지기 전인 2016년에 나왔고, 본격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건 영화팬 중 그를 모르는 이가 없게 된 2019년이다. 덜 유명한 작가가 대성한 뒤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렸으니 기획부터 출중했다 하겠다.
에세이를 읽는 게 사람을 읽는 것이라면, <쓸 만한 인간>은 읽는 건 아직 충분히 유명하지 않은 박정민을 만나는 몇 안 되는 방법이다. 보다 정확히는 그가 아직 20대이던 2013년부터 <동주> <변산> <사바하> 등 유명한 작품에 줄줄이 주연으로 출연한 2019년 30대 중반의 그를 차근히 만날 수 있다.
책에 실린 첫 글은 2013년 6월에 쓰인 것이다. 스물일곱 박정민은 첫 장편영화 <파수꾼>에 비중 있는 역할로 출연한 신인 배우다. 2005년부터 극단생활을 하며 연기를 익혔는데, 사람들에게 아직 널리 알려지진 못했다.
'정착'이라 이름 붙은 이 글에서 그는 에세이에 들어간 글들을 쓴 이유를 밝힌다. '아버지가 주는 돈 말고 내 돈으로 PC방을 가야겠다는 일념'이었다고. 또 '노트 혹은 하드디스크 혹은 미니홈피에서 부유하던 글을 이제 좀 정착시킬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었다고도.
글을 통해 만나는 20대 박정민은 가볍고 유쾌하며 무던한 청년인 것처럼 보인다. 일본과 유럽, 남미 등지를 자유롭게 다니는 여행자이며, 썩 공부를 잘해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재능 있는 청년이며, 꿈을 찾아 기꺼이 극단으로, 예술학교로 몸을 던지는 고집 있는 젊음이기도 하다. 20대 중반에 잡지사 'top class'에 정기 연재 자리를 얻었고, 잡지의 관심을 끌만큼 싸이월드와 블로그 따위를 활발하게 운영하기도 했다.
젊고 유망하며 조금은 불안한 청춘
에세이집 앞부분을 읽는 건 젊고 유망하며 약간의 불안을 안고 있는 그런 박정민과 대면하는 일이다. 그의 현재를 알고서 그의 과거와 만나는 건 색다른 일이다. 글 속 박정민에게 오늘 거둔 그의 성공을 설명한대도, 혹은 오늘의 박정민에게 글 속 박정민을 소개한대도 서로가 완전히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만큼 그의 모습은 달라져 있다.
2019년 개정판에 새로 삽입한 글에서 박정민은 스스로 '그 옛날에 묻어 있는 나와 지금 나의 간극은 이미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고'라고 고백할 만큼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흥미로운 건 변화가 곧 성장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쓸 만한 인간>은 박정민의 성장기이며, 충분한 변화를 이룩하기 위한 분투의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그것이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가치라 할 것이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기는 하다. 2013년부터 2019년 사이에 쓰인 글의 간극이 결코 작지 않다는 점이다. 개중에선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런 글을 읽어야 하는가'하는 아쉬움을 남기는 글도 여럿이다.
개정판에서 다듬고 삭제하고 덧붙여 보완한 부분이 적지 않음에도 글의 밀도와 무게에서 실망스런 대목이 상당하다는 건 분명한 아쉬움이다. 그 아쉬움을 나는 기대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한다.
고백하자면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나는 배우 박정민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그의 오래된 글을 읽는 시간을 기꺼이 즐길 수 있었다. 박정민이 지난 수년간 세상에 발산한 멋과 맛이 적지 않으므로, 나와 같이 그의 글을 읽을 독자도 꾸준할 것이다.
책 마지막 장에서 책으로 대중과 만나는 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던진 박정민은 얼마나 영리한 배우인가. 아마도 이 책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스테디셀러가 되겠구나.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