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오늘을 버텨내는 데 때로 한 문장이면 충분하니까> 서평
[김성호의 독서만세 141] 서메리 지음 '오늘을 버텨내는 데 때로 한 문장이면 충분하니까'
오늘을 버텨내는 데 때로 한 문장이면 충분하니까. 책 제목치곤 참 길다. 이렇게 긴 제목을 뽑았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다. 세상엔 오늘을 사는 게 아니라 '오늘을 버텨내는' 사람들이 꽤 많고, 가끔은 그들이 '한 권'이 아닌 '한 문장'에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오늘을 버텨내는 데 때로 한 문장이면 충분하니까>는 바로 그 점을 겨냥했다. 편집자가 책 말미에 '내용전개에 꼭 필요한 문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힘을 빡 준 주제문도 아닌데, 책을 읽다 보면 희한하게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을 만날 때가 있다'고 적은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우연히 읽은 책 어느 문장이 지금 꼭 필요한 것이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책이 아니더라도 흘러나오는 노랫말이나 광고 카피가 지금 이 순간 내가 와 닿는 그런 순간 말이다. 그런 경험을 해본 일이 있다면, 삶을 바꾸진 못해도 위로하고 지지해주는 문장이 있다는 데 공감할 수 있을 테다.
책은 번역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SNS와 유튜브 등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서메리의 글 모음집이다. SNS상에 적은 글을 모은 듯 73가지 짤막한 단상이 230여 페이지 남짓한 분량으로 묶였다. 프리드리히 니체, 버지니아 울프, 폴 오스터, 나다니엘 호손, T. S. 엘리엇, 메리 셸리 등 유명 작가의 한 문장을 따와 각 글의 앞에 붙였는데, 모두 저자가 각별히 좋아하는 책이라고 한다.
누군가의 오늘을 위로한 73문장을 만나다
"최고의 책을 뽑아달라"는 질문에 어느 한 권을 꼽지 못해 난감해지곤 하는 저자가 '제가 아끼는 73권의 책 속 특별한 문장을 엮었다'니 발상도 흥미롭다. 적어도 저자의 삶에 가 닿은 문장들이란 점에서 비슷한 상황의 어느 누구에겐 제법 큰 울림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메리는 제 일상 속 단상을 각 문장 뒤에 이어 붙여 이해를 돕는다. 각 문장이 제 삶에 미친 영향이 어떤 것인지를 이를 통해 짐작할 만하다.
평생 선생님으로 일한 엄마가 교사가 되길 권했지만 영문학과로 진학했고, 안정된 직장을 나와 프리랜서로 일하며 자리를 잡기까지의 이야기가 그녀가 쓴 글의 자양분이 됐다. 스스로 워커홀릭이라고 인정할 만큼 왕성한 활동을 하는 저자의 특징이 고스란히 묻어나 시시콜콜한 작은 이야기까지 한 편의 글로 탈바꿈했다.
많은 이들이 한 방향으로 내달리는 것만 같은 순간에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제 속도를 잃지 않으려는 저자의 마음가짐은 순간순간 위기와 직면한다. 훨씬 안정된 삶을 사는 것 같은 친구들조차 불안을 느끼는 게 현실이니, 속한 곳 없는 프리랜서는 오죽할까. 감정도, 불안도 남보다 크게 느끼는 천성을 지녔다는 저자는 섬세한 감상으로 일상 속 불안과 나름의 해법을 하나씩 풀어낸다.
하늘이 무너질까 무섭고, 땅이 꺼질까 무섭다. 나는 기본적으로 소심하디 소심한 인간이다. 세상에서 불확실성이 가장 두렵고, 미래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만한 일을 시작할 땐 플랜 B부터 플랜 Z까지 예비계획을 세워둬야 직성이 풀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놈의 인생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당연하지).(중략)나의 회사 탈출기는 시작부터 끝까지 처음 계획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스스로 강점이라고 생각했던 영어는 번역 학원 편입시험에 똑 떨어지면서 약점으로 드러났고, 오히려 누가 봐도 아마추어 수준이었던 일러스트 실력으로 들이댄 덕에 첫 프리랜서 일감을 받을 수 있었다. 곧 죽어도 사업할 배짱은 없던 나였지만 결국은 내 이름으로 출판사까지 냈다. - 39p
퇴사가 두려운 그대, 이 말 좀 들어봐요
언젠가부터 퇴사는 직장인의 화두가 됐다. 평생직장이란 말이 더는 통용되지 않는 21세기 직장인이라면 퇴사가 언젠가 닥쳐올 숙명이란 걸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퇴사와 제2의 삶에 대한 책들이 어김없이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이러한 영향이다.
하지만 퇴사는 여전히 두려운 것이다. 더 낫거나 비슷한 곳으로 옮겨가는 이직을 제외하고, 꿈을 좇거나 현실을 피해 도망치는 퇴사는 스스로를 완전히 망가뜨릴 것처럼 느껴지기 십상이다. 수도 없이 퇴사를 되뇌지만 몸은 직장에 매인 신세인 이들이 퇴사 관련 책을 그토록 많이 뒤적이는 것도 두려움 때문이다.
퇴사 후 프리랜서로 자리 잡은 서메리의 도전기는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받는다. 번역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가 프리랜서 중에선 제법 많은 이들이 바라는 직종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분야 프리랜서를 꿈꾸는 이들에게도 공감과 배움을 주는 부분이 적지 않다.
먼저 쓴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도 나름 독자들의 관심을 받았고, 유튜브와 SNS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답게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지점을 쓰다듬는 글을 여럿 써놨다. 프리랜서의 현실과 고충을 내비치고 제 자신의 불안과 우울을 다스리며 자존감과 행복을 지키는 서메리의 도전기는 분명한 호소력이 있다.
다만 글에서 남다른 통찰이나 배움을 얻기 어렵다는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SNS와 유튜브 같은 매체가 힘을 얻는 요즘은 짧은 메시지가 더 큰 호응을 받는다곤 하지만, 글 모두가 분량이 짧고 호흡도 얕아서 가벼운 일상 속 단상 이상의 깊이를 보여주진 못한다.
다행인 건 서메리가 계속 쓰고 말하길 멈추지 않을 거란 사실이다. 책에서 느껴지는 저자의 열정은 은은히 오래 타는 나무처럼 또 다른 결과물을 내어놓을 게 분명하니, 우린 그저 더 나은 다음 책이 나오길 기다리면 되는 일이다.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