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상

풍요롭다 말하겠다

단상

by 김성호

죽고 사는 일 말고 중한 건 아무것도 없다 여겨질 때가 있다. 나라를 구할 거냐 세상을 바꿀 거냐 어차피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삶이 아니더냐. 아무렇게 살다가 아무렇게나 가는 거야. 그런 마음이 덮쳐들 때가 있는 것이다.


오래 품은 꿈이 무너지면 세상은 흙빛이 된다. 마음에 들인 누구를 잃는다면 오로지 소음만이 들려온다. 사랑하는 이가 나을 길 없는 병을 얻는다면 그 많던 향도 냄새로만 구분될 뿐. 수만가지 불행 앞에서 인간이 살아남는 법이 이처럼 단순하다. 깊은 바다 아래 납작한 물고기처럼 이끼 밑에 들어앉은 깜깜한 돌멩이처럼 둔해지고 단단해지다 서서히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는 것이다.


흑과 백으로

시끄럽고 덜 시끄런 것으로

짜고 매운 것으로

무취와 악취로

세상 모든 게 싫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그보다도 더욱 더 단순해지다가는 마침내 죽고 사는 일 말곤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둔한 감각을 자극하려 더 세게 더 강하게 부벼대다가는 마침내 모든 젊음이 쇠하였다고 인정하는 건 슬픈 일이다. 말하자면 그건 황무지다. 탈 것도 태울 것도 남지 않은 사막이다. 마음 속 앙상한 노인이 누더기를 덮고서 하루에 하루치 황폐함만 더해가는, 폐허다.


인간에게 다리가 있는 건 걸을 수 있어서가 아니다. 걸어야만 해서다. 오랫동안 걸은 끝에 나는 걷는 일이 황폐로부터 인간을 구한단 걸 알게 되었다. 걷는 일은 경계를 마주하게 한다. 온갖 것은 경계에서 선명해지므로 둔한 이조차 사물의 색을 알아볼 수 있다. 노랗고 붉고 초록이며 시퍼런 것들을 보게 된다. 비 온 뒤 도드라지는 흙냄새와 부러진 나무 썩어가는 냄새, 향초 타는 냄새며 지글지글 전부치는 냄새, 사람마다 달리 나는 숨냄새와 살냄새를 맡는다. 돌기를 자극하는 달고 시고 짜고 맵고 느끼하고 감칠맛나는 온갓 것들이 입 안에서 뒤엉키고 구르고 터지는 것을 맛볼 때도 있다. 새소리와 흙밟는 소리, 부수수 낙엽 떨어지는 소리와 툭 하고 가지 부러지는 소리, 굴삭기가 바위 깨는 두당탕 소리와 물이 물을 밀어가는 소리, 텐션 높은 이들의 영양가 없는 소리며 다정하고 차분한 음성들까지를 경계에선 하나하나 뜯어서 들을 수 있는 일이다. 낯선 이를 만나고 늘어진 근육을 긴장케 하며 굵은 나무에 기대어서 심장 뛰는 박동을 가만히 느껴본다. 그럴때면 내가 겪은 고통들은 고통의 자리로, 잘못들은 잘못의 자리로, 그리움들은 그리움의 자리로, 슬픔들은 슬픔의 자리로, 후회들은 후회의 자리로 옮겨간다. 황폐한 대지의 모든 것이 형형색색 제 빛깔을 찾아가는 뒤로 고래만큼 마신 술이 냇물처럼 흘러 빠져나간다. 내려치는 햇살에도 빛깔이며 온도가 있다는 걸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목탁치는 스님과 상해버린 억새와 엉덩방아 찧는 사람들과 하하호호 떠드는 등산객들 사이로 강원도 정선 민둥산 해발 1119미터 고지가 구름 품에 안겨든다.


아마도 세상엔 죽고 사는 일따위는 생각조차 안 날 만큼 즐거운 게 많을 거다. 지난시간 잃어버린 많은 것들이 축제장 진한 냄새에 지워지는 시간이다. 이놈의 축제는 도토리묵을 이만원에 국밥을 만원에 팔아서 나를 상심하게 한다. 막걸리로 잊어버릴까 하다가도 그러면 오늘 밤도 나는 술을 그치지 못할 거라 근심한다. 취하고 흔들리고 아무것도 중한 것이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문득 두려워진다. 사소한 일에 걱정하고 사소한 일에 화를 내고 사소한 욕심들을 부려보면서 사소하게 다투고 즐기는 일, 세상엔 얼마나 많은 사소함들이 뒤엉켜 재미나게 살아가는 것인지를 나는 더 잘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붉고 노래진 이파리를 예쁘다고 여기면서 뭉개진 은행과 씻지 않은 시골개 시큼한 냄새를 뭉뚱그려 맡는 시간, 나는 지금을 풍요롭다 말하겠다.



2022. 10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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