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말했다.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곧잘 외우곤 했던 나는 이 말 역시 그대로 외워버렸다. 인간은 존엄하다. 역사는 진보한다. 존엄이 무슨 말인지, 진보는 무얼 뜻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믿어버리기로 했다. 사실이라면 나는 존엄하고 우리 집도, 나를 둘러싼 세상도 계속 나아질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나의 믿음을 수시로 흔들었다. 알코올 중독자가 아내를 두들겨패고 선생이 교묘하게 학생을 학대하는 세상에서, 잘 차려입은 여자가 제 아들을 위한다며 교사를 매수하고 경찰서에서 목사가 제 자식만 빼내겠다고 위증을 강요하는 모습 따위를 지켜보면서, 나는 인간이 모두 존엄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남의 개를 훔쳐 두들겨 패 죽이는 인간이, 골목에서 여자를 끌고 가 강간하는 인간이, 누구에겐 간절한 일자리를 뒷거래하는 인간들이 어떻게 존엄할 수 있단 말인가.
역사가 진보하는지도 의문이었다. 가장 정직한 교사가 누명을 쓰고 교단을 떠나는 것을, 가장 의로운 학생이 따돌림을 당해 자퇴하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사람들은 더 쉽게 남의 것을 빼앗았고 제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성을 쌓아 올리고는 하였다. 평등하고 공정하며 정의로운 세상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차별하고 부당하며 사사로운 이득에 침을 질질 흘리는 광경 또한 수없이 목격하였다. 기술은 진보하고 사회는 풍요로워지지만 역사는 진정으로 진보하는 것인가. 의심하지 않는 건 어리석다는 뜻이 아닌가.
하지만 이따금은 어떤 인간을 본다. 인간이 존엄하다고 믿도록 이끄는 인간을, 역사는 진보한다고 여기게 하는 사람을 만난다. 제 삶과 행동을 책임지고, 생각한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다. 제 철학과 사상을 고양시키며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세상엔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제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뒤에도, 제가 아는 온 세상이 저를 저버린 후에도, 스스로와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 아주 약간이어서 소중한 이들을 나는 몇명쯤은 알고 있다. 그런 이는 주변을 물들게 한다. 그의 삶을 존중해서 각자의 힘을 기꺼이 보태려는 이들이 생겨난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한 데 모여 함께 소리 지르게 한다. 나는 그들과 만나서야 정말로 인간이 존엄한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이들이 제 꿈을 실현하게 될 때, 역사는 그렇게 진보하는 것이라 나는 믿고 있는 것이다. 내가 몇이나마 그런 이들을 알고 지낸다는 사실에 깊은 안도감이 들 때가 많았다.
이따금씩 그런 이를 잃는 때가 있다. 모든 인간이 죽지마는 훌륭한 이가 죽는다는 건 특별히 더 슬프게 다가온다. 수백수천의 죽음마저도 무의미하게 여기는 내가 어느 한 죽음에 이토록 무력하게 무너져내린다는 게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때로 그런 상실은 존엄이며 진보에 대한 믿음까지도 옅어지게 만든다. 나의 세상은 그렇게 더 어둡고 탁해져간다. 난 여적 그 상실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2022. 10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