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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호 Aug 19. 2023

투표로 선장 뽑고 다치면 보상 받던 중세 해적들

오마이뉴스 게재, <해적에 관한 불편한 진실> 서평

[김성호의 독서만세 145] '해적에 관한 불편한 진실'


지난 2017년부터 2018년 사이에 상선에 몸을 싣고 인도양과 대서양, 지중해와 북해 등지를 오갔다. 종일 해도를 보고 배를 조종하고 화물을 관리하며 뱃사람으로 살았다. 위성으로 망망대해에서도 제 위치를 잃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지만 바다 위엔 육지와는 전혀 다른 어려움이 넘쳐흘렀다.


<원피스> 같은 만화나 <캐리비안의 해적> 같은 영화에 나오는 해적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강력한 무기를 실은 배 수십 척을 호령하는 대해적이 되어 바다를 호령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어선을 개조한 소형선박에 모터보트를 싣고서 몰래 배에 기어올라 사람을 납치하고 배를 뺏는 가난한 해적들이 있을 뿐이다.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서해안을 타고 유럽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선교 뒤편 통신장비에서 수백 해리 떨어진 곳에서 해적의 위협을 겪은 유조선이 보내온 통신이 들어왔다. 해적들이 상갑판에 올라왔으나 선원들이 시타델(내부에서 폐쇄하는 대피공간)로 대피해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그 얼마 전에는 가나 인근 해역에서 어선 선원 몇이 피랍됐다는 무전도 있었다. 이따금 뉴스로나 듣던 해적 이야기가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유럽을 오가는 배를 모는 항해사라면 해적에 대응하는 훈련을 수시로 실시한다. 아덴만이나 아프리카 서안 같은 위험구역을 지나면서는 갑판 위에 허수아비를 세우고 소방호스로 물을 뿜는 훈련을 한다. 혹시나 해적이 승선할 걸 대비해 선내에 물과 음식, 통신장비를 갖춘 대피공간을 만들어두고 대피훈련도 한다.


그럼에도 매년 어선과 케미칼운반선 같이 대응이 취약한 선박들이 피랍되는 일이 생기는 게 현실이다. 통계상 매년 200여건의 선원 피랍사건이 발생하며, 개중에 한국 선원이 납치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올해만 해도 5월엔 한국인 선장이, 8월엔 한국인 선원 2명이 가나 앞바다에서 참치조업 중에 납치됐다.


해적의 어제와 오늘을 읽다

             

▲ 해적에 관한 불편한 진실 책 표지ⓒ 지성사


지성사 신간 <해적에 관한 불편한 진실>은 해적의 어제와 오늘을 알 수 있는 책이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일일이 백과사전을 두드릴 필요 없이 해적에 대한 지식을 책 한 권으로 만날 수 있는 대중교양서적이다.


과학을 대중에게 친근하게 소개해온 지성사는 해양부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저자로 내세워 '해양문고' 시리즈를 출간해왔는데, 이 책이 그 41번째 저술이다. 처음엔 천문과 환경, 지구과학과 생태 등 과학과 엮일 수 있는 내용이었으나 대중이 흥미를 느낄 수 있을 법한 이야기를 하나씩 더하다가 마침내 해적의 역사에 이른 것이다.


해적이 출몰하는 지역부터 활용하는 도구, 시대적 배경 등을 두루 다루는 책이 가장 흥미로워지는 건 역시 해적의 전성시대를 다루면서부터다. 정해진 해역을 벗어나지 못하던 항해가 대륙과 대륙, 문화권과 문화권으로 확장된 15세기부터 해적들의 전성시대가 꽃피는 것이다.


영국이 당대 최강이던 스페인을 공략하기 위해, 또 프랑스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후엔 미국이 유럽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해적을 뒷받침한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롭다. 제해권을 둘러싼 일대 해전을 벌이기 전에 오가는 상선들을 약탈하고 뱃길을 불안하게 해 주도권을 가져오는 전략을 수많은 나라들이 공공연히 써왔다는 사실은 적잖은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질 것이다.


대항해시대 초기엔 국가공인 해적인 사략선을 적극 운용했던 영국이 1856년 사략선을 전폐하는 파리선언을 주도하기까지 사실상 국가 공인 해적들이 상선을 약탈하고 그 이익금을 정부에 바쳤다는 이야기는 놀랍기 짝이 없다.


책엔 등장하지 않지만 파리선언 당시 사략선 폐지에 반대한 나라가 미국과 멕시코, 스페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안정을 원하는 건 패권국이고 불안을 원하는 건 그에 도전하는 국가라는 원리가 역사적으로 반복돼 온 게 아닌가 한다.


선장은 투표로, 다치면 보상을


해적들의 규율에도 인상적인 부분이 적지 않다. 선단을 이끌 장을 투표로 뽑는 문화나 선장 선출에서 패배한 후보를 민 해적들이 신임 선장을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떠날 권리를 가졌다는 대목 등이 그렇다. 또 배 안에서 어떠한 상해도 허용하지 않고 다툼은 육지에서 하도록 했다는 부분, 근무 중 입은 부상은 정도에 따라 달리 보상해주는 문화가 있었다는 점, 공식적으로 전리품을 선장과 말단 선원이 2배 차이 정도로 배분한 사실 등도 흥미롭다.


확고한 신분제와 불공정한 분배, 사회안전망의 부재 속에서 살아온 이들이 해적이 되어 만들어낸 질서는, 비록 그 질서가 약탈을 목표로 하며 때때로 붕괴되곤 했을지라도 충분한 시사점이 있다. 문명화된 오늘날 사회에서 탈법을 일삼아온 재벌총수가 천문학적인 돈을 배당으로 받는 모습, 오랜 기간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노동자가 쓸모 없어지면 단박에 정리해고당하는 광경을 우리는 너무 많이 보지 않았던가 말이다.


근무 중 불구가 된 해적이 800은화를, 오른팔을 잃으면 600은화, 왼팔과 오른다리는 500은화, 왼 다리는 400은화, 손가락 하나는 100은화를 기금에서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은 5세기 전 해적에게조차 사회보장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최근까지도 산업재해를 입은 노동자가 쏟아지지만 위험의 외주화로 인해 원청은 이를 외면하는 한국의 모습은 해적들 앞에서조차 떳떳할 수 없다. 한국 사회의 부가 산업이 이룩한 것이라면 노동자들은 그 산업전선에 앞장선 유공자가 아닌가 말이다.


<해적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 다루고 있는 소외됐지만 재밌는 역사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분명한 시사점을 던진다. 애플 창사 40주년을 맞아 본사 사옥에 해적의 상징인 졸리 로저 깃발을 내건 스티브 잡스가 그랬듯, 2021년 한국도 해적에게 배워야 할 게 몹시 많다.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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