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중요한 변화는 아주 작은 곳에서 비롯된다. 2022 유럽영화제에서 만난 두 편의 영화도 모두 그러했다.
학부모 면담 이후 낙담한 마르틴을 위로하려 모인 친구들은 그의 심각한 모습에 술을 권한다. 언제나 엄격하게 지내는 그에게 약간이나마 풀어지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그저 가볍게 권하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에겐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쯤 부족한 걸지도 모른다는, 취하는 게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논리가 제법 설득력 있게 들리는 건 내가 주정뱅이라서일까. 주저하던 마르틴이 술을 들이켜자 오랫동안 막혀있던 혈관이 뚫리듯이 눈물 한 줄기가 새어나온다.
<어나더 라운드>는 지쳐 있던 삶에도 다음 장이 있다는 걸 알린다. 영화의 마지막, 마르틴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재즈발레 댄스를 춘다. 술을 들이부으며 인생을 즐긴다. 그에겐 아직 망가지지 않은 것이 제법 많이 남아 있다는 걸 그도, 그를 지켜보는 관객들도 안다. 영화를 보는 우리의 인생이 그렇듯이.
인물들은 인생을 술로써 긍정하고, 술로써 부정한다. 그것이 진정한 술꾼의 삶이다. 술을 제대로 마실 줄 아는 이라면 이 영화가 말하는 슬픔들과 기쁨들에, 절망과 희망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라운드 끝나면 다음 라운드 뛰는 게 인생 아닌가. 녹아웃 당하고 뻗거나 탭치고 드러눕지 않을 거라면 가야지 뭐 어쩌겠나. 기왕 갈 거라면 즐겁게 가야 하는 것이고.
토마스 빈테베르그 감독은 이 영화 촬영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딸아이를 잃었다. 영화 속 마르틴의 딸로 등장하기로 했던 어린 이다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영화 찍기를 멈추지 않았다. 영화 안에 제가 느낀 절절한 감상을 그대로 녹여내길 선택했다. 그래서 영화 속엔 절망과 우울, 슬픔과 패배감이 함께 흐른다. 그리고 그로부터 마르틴의 격정적인 춤사위가 터져 나오기에 이르는 것이다. 어떤 역경이 오더라도 삶은 계속 흐르는 것이라는, 그 모든 기쁨과 슬픔들을 생생히 느끼면서 인간은 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가 관객에게 전한다.
나는 이 영화보다 술을 더 부르는 영화를 정말이지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다.
다음날 본 건 조지아 국립무용학교 학생들이 나오는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다. 영화는 국립무용단 단원을 꿈꾸는 이들의 도전기이자 조지아의 경직된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비판적 작품이다. 영화 내내 강조되는 민족적 기상은 도리어 조지아의 아이들과 그 가능성을 억누른다. 조지아의 짙은 가난이 수도인 트빌리시에서조차 희망을 앗아가고 있다. 더는 부자가 아닌 마리는 한때 유학한 런던을 끝도 없이 추억한다. 그런 추억은 차라리 집착이며 미련이라 불러야 마땅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메라비는 춤을 춘다. "그만 추라"는 감독관들의 제지에도 굴하지 않고, 저만의 춤을 자유롭게 펼친다. 감독관은 교수에게 "도대체 저 춤이 뭔가" 하고 묻지만 교수도 메라비가 추는 것이 무언지를 알지 못한다. 메라비는 저만의 춤을 춘다. 더 섬세하게, 더 부드럽게, 더 매혹적으로. 중단하라는 명령에도 북잡이는 북을 치길 멈추지 않는다. 지켜보는 마리는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메라비의 춤은 사람들을 끌어 잡는다. 멈추지 않는 그 기상이 "더 강하게"만 외치는 교수들보다 훨씬 더 조지아의 사내답다.
영화 속 메라비의 형은 메라비에게 조국을 떠나라고 말한다. 조지아에 더는 희망이 없다고 소리죽여 말한다. 제 뿌리를 향하여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이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때로 나는 제가 몸담은 곳을 향해 가장 큰 목소리로 비난하는 이만큼 그를 더 애정하는 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조지아에 희망은 없다고, 영화 속 인물의 입을 빌려 말하는 아킨으로부터 제 부모의 조국이며 저의 뿌리를 향한 애증이 읽히는 건 그래서다.
두 편의 영화는 술과 예술을 말한다. 술과 예술을 아는 이는 삶을 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내가 원하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이다.
2022. 11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