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삼백명이랑 봤다. 해설하는 아줌마 있었고 우는 아줌마 있었고 깔깔대는 아줌마 있었고 영화보다 전화받는 아줌마 있었고 남의 자리 앉았다가 밀려나는 아줌마도 있었고 그 아줌마가 자리 주인한테 그럴 거면 일찍 오지 그랬냐고 한 마디 하는 모습까지 있었다. 그런데도 그 모두가 이해가 됐다. 어떤 관점에선 그런 태도가 틀리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가 있었고 여적 그 시대가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으므로.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가 아는 것이 옳다고 확정적으로 믿는다. 또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절대적 옳음처럼 여긴다. 그러나 문화며 인생은 수학과는 달라서 자주 상대적이고 때로 그보다 더 상대적이다. 그러니 키워야 할 것은 내가 아는 옳음이 옳다는 확신이 아니다. 지금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은 나와 다를 뿐이지는 않은가 돌아볼 수 있는 여유, 또 무엇에든 부닥쳐 이해해보려는 의지가 아닌가 싶다. 결국 촌스러워보였던 이 영화가 삼백아줌마를 울리고 웃기고 다시 울리고 웃기는 데 성공했으므로 나는 이 영화가 제법 괜찮았다고 기록해둔다.
여기까지 읽은 여자는 대뜸 흠부터 잡고 나선다. 아줌마를 아줌마라 한 것이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나 어떻다나. 말하자면 아줌마는 아이의 주머니로 애를 가진 여자한테나 쓰던 것인데 내가 아줌마라 부른 이가 아줌마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고작 한 살이 많은 데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대여섯쯤은 더 먹었으리라 짐작한 이다. 그녀는 지지난 모임에서 교복입은 애가 저를 아줌마라 불렀다며 길길이 날뛰는 글을 쓰기까지 했었다. 그러니 아줌마에 민감한 건 아줌마란 호칭 그 자체가 아니라 급격하게 노화하는 제 몸뚱이에 대한 안타까움이리라고, 나는 그쯤에서 타협을 보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엄격함은 글 쓰는 이가 어떻게 아줌마란 호칭을 쓸 수가 있느냐로, 마침내는 제 글을 읽고도 몇주만에 아줌마를 반복하여 써온 저의로까지 옮겨붙고야 만다.
대저 아줌마는 아줌마로 보이는 이에게 쓰는 것이다. 반면 이 나라의 사지멀쩡한 청년들은 군에 입대하는 순간부터 제 집의 귀한 아들이며 새파란 젊음이며 또렷한 두뇌며 빛나는 육체에도 불구하고 군바리며 땅개며 아저씨로 불리우는 걸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젊음들이 아저씨라 부르지 말라며 염병을 떠는 날엔 뒤통수를 휘갈기기 십상인 것이다. 그건 대한의 아들들이 듣는 이의 불편 만큼 부르는 이의 자유를 인정하는 드넓은 가슴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나는 그렇게 우겨대곤 했던 것이다.
반면 이 민감한 세상에선 아줌마를 아줌마라 불렀다 하여 감수성이 어떠니 상식이 어떠니들 하는 것인데 이 나라 아저씨들이 총을 들고 저런 무식한 이들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켜야 한다는 사실에 개탄을 금치 못할 뿐이다. 이 무식한 이들은 내게 아줌마 대신 선생님이라 쓸 것이며, 그녀 대신 그로 통일하라 강요를 하는데 이쯤되면 나는 이들이 등단 작가이며 기자이며 잘 나가는 직업인이란 사실에 당혹을 감출 수 없다. 그리하여 내게서 아줌마며 그녀 같은 단어를 앗아간다면 문학계가 지금보다 무해해지기라도 할 것이냐 말이다.
세상의 무지한 자들은 세상 모든 것이 제가 믿는 방식으로 분해되고 재조립되어야만 만족할 것인데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을 뿐더러 와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극장에서 핸드폰을 켜는 게 불편한 이가 있다고 치자. 그 불편함을 꺼내어 논의하고 더 나은 문화를 정착시키는 건 문화인의 자세다. 그러나 그런 이를 일으켜세워 면박을 주고 극장에 들이지 않으며 법으로 처단하는 건 야만인의 방식이다. 그런 이는 이내 극장에서 무얼 먹는 이도, 코를 고는 이도, 뒤늦게 들어오는 이도, 마침내는 극장에서 숨소리를 크게 내는 이도 출입금지를 시키고야 말 것이다. 그리하여 저보다 불편을 더 잘 느끼는 이들만 남았을 때 슬쩍 옆을 돌아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죄로 쫓겨나고야 말 것이다. 세상은 결코 그런 멸균실일 수가 없다.
어쩌다 세상이 불편러들로 가득해졌는가를 돌아보다보니 이 인간들이 험한 일을 안 해봐서는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기 철원 땅 북쪽 언덕을 지키다 보면, 높은분들이 부식비를 해처먹고 군화며 의류비며 기름이며 온갖 것을 해처먹는 그곳에서 조인트 까이고 대가리를 박아봤다면, 저 먼 나라에서 온갖 허접스레기한테 뒷돈을 멕여가며 외화를 벌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면, 세상 모든 것이 키보드 앞에서 따닥따닥 하듯 돌아가진 않는다는 걸 알텐데 그런 꼰대같은 생각을 참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2022. 12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