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 마땅한 것을 기억하기

사람 찾아 떠나는 여행

by 김성호

일 만을 훌쩍 넘는 대군이 와해되고 포위를 뚫을 가망도 사라진 상황에서 신숭겸과 김락이 나서 왕건을 설득한다. 한고조 유방을 구한 기신의 고사대로 저들이 왕인양 적의 관심을 끌겠다는 것이었다.


평민의 복장을 한 왕건이 도주하는 동안 신숭겸과 김락은 얼마 남지 않은 기마를 추려 남측의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 포위망 안에서 장렬히 전사한 신숭겸과 포위망을 뚫어냈으나 중상을 입고 더 도주하지 못한 김락이 모두 공산 일대에서 산화한다. 이들이 왕건이 아님을 뒤늦게 알아챈 후백제군은 몇주에 걸쳐 일대를 샅샅이 뒤지지만 끝내 왕건을 찾는데 실패한다.


전투 내내 허만 찔린 왕건이지만 도주할 때는 기지를 발휘한다. 북으로 가는 길목을 쥐고 있을 후백제군의 의표를 찔러 되려 남으로 향한다. 그로부터 몇 달에 걸친 도주와 잠적 끝에 북방의 안전한 땅으로 탈출하게 된다. 훗날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제 묫자리로 봐둔 춘천 땅을 신숭겸에게 내어주고, 그가 숨진 대구 땅에 절을 세워 그 명복을 빌게 했다. 그 자리가 오늘까지 이어져 신숭겸 장군을 기념하는 유적지가 된 것이다.


일만 병졸이 몰살당한 산자락이 오늘에 이르러 팔공산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걸 보니 어딘지 짠한 마음이 든다. 여덟의 장수조차 신숭겸과 김락을 제하면 그 동선과 역할, 최후까지를 알기 어려운 실정이다. 하물며 덧없이 스러진 병졸의 목숨은 누가 기려준단 말인가. 역사란 언제나 가진 것 없는 이에게 가혹하다.


무튼 남방 제일 명장 견훤과 북방에서 경험을 쌓은 왕건의 대결은 비좁은 한반도 전쟁사에서 독보적인 매력을 발한다. 지리을 알고 군사를 알아 열세일 때도 지지 않던 견훤이 끝내 왕건의 포용책에 무너지는 모습은 어떤 업도 홀로는 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신숭겸은 고려 장수 중에도 왕의 아우라 할 만큼 특별한 장수였다. 그런 그가 제 목숨에 앞서 왕건을 구하고자 한 뜻이 무엇이었을지 곱씹을 수록 존경스럽다. 평민의 복식으로 도주하면 더 많은 이들이 살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고려군은 끝내 도주 대신 결전을 결의한다. 그러나 전멸을 각오한 결전에서 왕을 빼내기로 뜻을 모으니 장수와 병졸이 장수를 신뢰하고 왕을 아끼는 마음이 절절히 읽힌다.


신숭겸에 대한 왕건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그 가문의 번창을 보면 답이 나온다. 시조인 신숭겸 이래 평산 신씨는 재능 있는 인물을 여럿 배출한다. 임진왜란 직전까지는 그래도 조선에서 제일가는 무재로 꼽힌 신립, 임진왜란 당시 육전 최초 승전보를 올린 신각, 당대의 문사로 이름 높은 신흠 등이 모두 그 후손이다. 특히 신흠은 지묘사 자리에 순절단을 쌓아 장군의 정신을 기렸다.


신숭겸 장군 유적지는 대구 외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점차 명성을 얻어가는 추세다. 그건 이곳에 심어둔 나이든 배롱나무가 화사한 꽃을 피우고 그 덕분에 사진을 찍기 좋은 명소로 알려진 덕이다. 하지만 이 장소를 가만히 살펴보면 한반도 유적 가운데서는 찾기 어려울 만큼 잘 관리된 곳으로 매력이 충분하다. 고려에서 제일가는 공신이자 대의를 위해 제 목숨을 바친 충절의 상징으로 그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요소가 그대로 보존돼 있는 덕이다.


대구 북쪽 팔공산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팔공산 케이블카나 동화사와 함께 신숭겸 장군 유적지를 찾아봄직하다. 지묘동이란 이름의 유래부터 유적지 안에 나붙은 설명을 찬찬히 헤아리며 잘 관리된 유적지 내부를 걷다보면 천 년도 더 된 한반도의 역사가 선연히 되살아날지도 모를 일이다. 자고로 역사를 안다는 건 기억해 마땅한 것을 기억한다는 것이니까.



2022. 12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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